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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내게 배우라

by 삶의언어 posted Jun 02, 2024 Views 1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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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장 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
주님의 멍에 메고 배울때
금세와 내세에 참 평안 누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밭을 갈 때 어미소 옆에 새끼소를 바짝 세워서 밭을 갈았습니다. 멍에는 어미소 목에 걸려있고 새끼는 어미의 멍에 밑에 들어가서 함께 밭을 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미소가 힘을 내어서 멍에를 끌면 새끼소는 쉽고 가볍게 그 어미의 멍에 밑에서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 아래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고 무조건 자기 마음대로 천방지축으로 걸어간다고 해서 마음에 쉼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멍에는 주님 목에 걸렸으니 주님 옆에 바짝 다가서서 주님과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야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을 수 있고 주님을 따라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울수 있는지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1. 겸손을 배우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당사자가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다는 것은 굉장히 낮아진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높아지는 것은 쉽지만 높은 자리에 있다가 낮아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영이 죽고 저주받고 병든 인간과 하나되기 위해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심으로 겸손함을 채득하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으로서 사셨던 삶도 철저히 낮은 삶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의 마굿간이었습니다. 또한 누울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 강보를 깔고 누우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비천한 환경 가운데 처해있다 할지라도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서 짐승의 구유에 눕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가장 비천한 처지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실 때 왕궁이나 귀인의 집에 태어나지 않으시고 가장 가난한 가정에서 그리고 베들레헴의 말구유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가슴이 저리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라날 때 나사렛에 가서 그 아버지 요셉의 목수일을 도우면서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 목수는 별로 대단한 직업이 아니었으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목수의 아들로 자라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30여 살이 되어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요단강에서 침례받으심으로 성령이 임하셔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였을 때에도 풍찬노숙의 생활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정처없는 나그네 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상상할 수 없는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나셨고 비천한 삶을 살았으며 그러한 생활 가운데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중에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아무런 반항도 없이 털깎는 자 앞에 조용히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묵묵하게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절에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시고 7절에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높은 보좌에서 천한 인간의 몸, 종의 형태를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서 그 멍에 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코드가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코드가 맞으려면 그리스도와 같이 겸손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교부 성 어거스틴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F. B. 마이어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여러 층으로 된 선반에 있는 줄로 알고 우리의 키가 높아질수록 그 여러 층의 것을 가질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후에 깨닫기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여러 층 되는 낮은 선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을 받으려면 내가 높아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더욱 나를 굽히고 내려가며 또 내려가기를 힘써야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문학상을 수상했던 패트릭 화이트는 “인간은 진정으로 겸손해질 때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를 나타내고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분쟁을 일으킵니다. 왜 우리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노와 질투가 있는 것입니까? 이유는 서로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앞선 사람들을 시기하고 모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낮아지려 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높이고 낮추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면 낮출 자가없고 하나님께서 낮추시면 높일 자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는 낮아지고 스스로 겸손하게 낮아지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0장 43절로 44절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의 멍에 아래 들어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려면 스스로 낮아질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신자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멍에를 메기 위해서는 낮아지고 또 겸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은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지 낮은데서 높은데로 올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지 낮은 곳에서 높은데로 올라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2. 탐욕을 버리신 것을 배우라

 

 예수님의 멍에를 메기 위해서는 탐욕을 버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요단강에서 침례 받은신 후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광야에 들어가서 사십주 사십야를 금식하시고 주리실 때에 마귀가 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3절로 4절에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권능을 사용하여 육신의 정욕인 구복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정욕이 아닌 말씀 중심으로 살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다시 안목의 정욕으로 시험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 명예를 얻으라. 어떠한 기사와 이적을 베풀어도 좋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명예를 얻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6절로 7절에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위해 인산인해로 모인 곳에 무사히 뛰어 내리게 되면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받고 존경함을 받게 됨으로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날에도 명예를 얻기 위해서 허위 조작하여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일을 쉬지 않고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4장 9절로 10절에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이 세상 자랑인 권력과 부귀를 가지고 시험했습니다. 권력과 돈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귀하고도 손을 잡는데 주저하지 않는 현실이 오늘날의 우리의 세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위대한 정치가들이 권력을 얻기 위해서 마귀와 손을 잡음으로 얼마나 많은 비극을 초래하였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러 오는 것이지 행복과 기쁨과 소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탐욕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파멸시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 아시고 마귀가 주는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린드버그라는 사람은 1930년 단발기 프로펠러 비행기로 북대서양을 건너서 처음으로 파리에 안착시킨 위대한 비행사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의 방문소식을 들은 한 담배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 자기 회사의 담배를 선전할 목적으로 린드버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선생님, 이 담배를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한 번만 포즈를 취해 주시면 그 값으로 사진 한 장에 5만달러를 드리겠습니다”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당시의 5만 달러는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린드버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하기를 “나는 침례받은 기독교 신자입니다. 나는 담배도 피지 않고 담배 광고도 원치 않습니다”라고 거부했습니다. 얼마 후 이 일이 신문에 났고 이를 전해 듣고 감격한 성도들이 린드버그를 위해서 5만 달러가 아닌 10만 달러의 성금을 전해준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라가려면 탐욕을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탐욕이란 분수를 넘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을 하려하고 또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갖고자 한다면 이는 모두 탐욕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의 분수를 지킨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주님의 멍에 밑에 들어가 주님의 겸손함과 함께 탐욕을 저버리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3. 순종을 배우라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언어 심사 행동을 하나님 중심으로 하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인본주의적인 입장에 서서 행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내 마음의 보좌에서 나를 끌어 내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모습인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의 보좌를 점령해서 내가 먹고 마시고 눕고 일어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때 순종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자신의 보좌에 앉아서 주장하는 것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앉을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시기 위해서 많은 시험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이 사신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삶에서 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죽음에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 앞에서 벌거벗기고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서 험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당시에 로마에 의해서 행하여졌던 십자가 처형은 가장 극악한 죄수에게 가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아 매달아 놓고 서서히 피를 흘리게 하여 결국에는 호흡곤란을 일으켜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라면 인류를 위해서 그 흉악한 십자가의 고난도 대신 짊어지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무엇이 그렇게 중한 죄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청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죄를 대신해야 할 만큼 우리의 죄는 중하고도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나 고행, 또는 수양과 도덕이 그 죄악을 청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짐에 눌려서 모두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런 인간의 죄악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극한 고통을 당하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모두 청산하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가장 흉악하고 고통스러운 죽음까지도 주님은 복종하셨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입니까? 아브라함도 우리도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와는 분명히 다른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100살이 되어서 낳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는 모리아산에 데려와서 각을 떠서 장작불에 태워 재물로 바치라고 할 때 두 말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데리고 사흘길을 가서 모리아산에 올라가 그 아들을 묶어서 장작불 위에 얹어 놓고 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처럼 우리에게도 독자를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고 한다면 이에 순종해서 나아갈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내놓은 것에 대한 모형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극한적인 순종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함께 동행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성령의 도움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4. 의지함을 배우라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했던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시도 자기의 지혜나 총명이나 모략이나 재능이나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아버지께 의지했습니다. 시편 22편 4절로 11절은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야훼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라고 말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를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힘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면 왜 주님을 의지합니까?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이 있으면 왜 주님께 의지합니까? 주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삶과 죽음을 가리지 않고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6절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고통을 당하시고 숨을 거두실 때에도 그는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긴다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J. 오스왈드 샌더슨이 쓴 「평신도 사역자의 성장을 위한 20가지 영적 원리」라는 책에서 스튜어트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인간의 능력과 자신감이 아닌 약함과 겸손을 선택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범하고, 무력하고, 결점이 많기 때문에 사용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들 때문에 우리를 사용하신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능력이 많고 지식이 많고 유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고, 무지하고, 연약하여 보잘 것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빈그릇을 택하여서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셔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한없이 약해지졌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께 그 영혼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맡으신 하나님은 사흘만에 무덤에서 일으키시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애창하는 찬송 가운데 하나가 363장(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입니다. 이 찬송가는 엘리사 호프먼 목사가 성도와 상담한 후 작사한 곡입니다. 하루는 아주 큰 시련을 당한 성도가 호프먼 목사를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근심에 싸인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며 울부짖었습니다. 호프먼 목사는 한참 동안 그 성도의 사연을 듣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라고 간절히 격려해 주고 또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성도는 밝은 얼굴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래요 목사님, 이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맡겨야겠어요” 이 말을 들은 호프먼 목사는 영감이 떠올라 성도가 돌아간 직후 곧바로 펜을 들어 찬송시를 짓기 시작한 것이 바로 찬송가 363장입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 근심에 싸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우리가 주님의 멍에 밑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동거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우리 일생을 맡기고 의지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아버지와 구주 예수님의 성실하심을 바라보고 그를 의지하고 따라갈 때 주님과 함께 멍에 밑에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멍에를 목에 메시고 우리의 죄 짐, 불안한 삶의 짐, 병의 짐, 고생의 짐, 죽음과 절망의 짐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는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탐심과 욕심을 버리는 것을 배워야 하고 순종함과 전적으로 의지함을 배울 때 주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우리의 삶을 금세와 영원한 내세까지 참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내게로 와서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우지 않고는 함께 멍에 밑에 걸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과 보조를 맞추는 것을 배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겸손을 배우고 욕심을 버리는 것을 배우고 순종을 배우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배워서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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