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야훼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애굽기 15장 22∼25절
우리의 삶 항상 쓴물 넘쳐
십자가 그리스도 끌어 안으면
사랑 평화 행복 가득한 삶 누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중생의 체험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상 광야의 길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쓴물이 마음속에 생겨 고통 당하고 심신이 병들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쓴물을 무엇으로 달게 하고 우리가 이 광야 여행길을 편안하게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의지하면 우리 마음속의 쓴물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광야 길을 여행하는 동안 어떠한 쓴물이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입니까?
1. 미움과 분노의 쓴물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과 서로 부딪히므로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오사카 대학에서 실험을 해본 결과 개를 분노케 해서 그 피 속에서 나오는 독소를 여덟 마리 개에게 각각 주사했더니 모두 죽었습니다. 그만큼 분노에는 어마어마한 독소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분노하면 이처럼 우리의 심신이 병들고 고통당합니다. 우리는 왜 미움과 분노의 쓴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매일매일 극심한 생존경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편안히 살면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존경쟁에서 밀고 밀리고 쫓고 쫓기는 가운데 서로 상처를 입고 분노와 미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욥기 5장 2절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노는 죽이는 독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30∼40대 남자들은 피곤합니다. 직장에서는 선배와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하고,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견제해야 합니다. IMF 이후 퇴직의 압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남자들은 편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같이 아버지로서의 권위와 힘보다는 아이를 중심으로 하는 풍조로 인해 자녀들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30∼40대 남자 사망률이 세계에서 1위입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40대 남자의 ‘2004년 사망원인 통계 결과’를 보면 사망 원인 1위가 54%로 간질환입니다. 2위는 자살(43%), 3위는 간암(35%), 4위는 뇌졸중(28%) 순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40대 남자가 생존경쟁의 치열한 생활 속에서 얼마나 피곤하고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수 있습니다. 삶의 경쟁 속에 별도리 없이 사람들은 시달리기 때문에 미움과 분노의 스트레스에 걸리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끊임없이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스케줄에 꽉 짜여 아침 정시에 출근해서 일하고 목표를 성취해야 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간에 쫓기는 노예생활을 합니다.
전도서 2장 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매일같이 긴장하고 슬퍼하고 쉬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무엇을 하든지 더 많은 성과를 요구합니다.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별도리 없이 직장도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서울시청에서는 공무원이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퇴직시키겠다는 발표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과를 나타내려고 끊임없이 뛰고 긴장해야 합니다. 지난 달 신문에서 직장인 1735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일중독 증후군’에 대한 조사 결과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면 조사에 참여한 사람 중 51.2%가 자신을 일중독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하기로 유명한데 OECD 국가 중 단연 최고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일본사람을 게을러 보이게 하는 유일한 민족은 한국 사람밖에 없답니다. ‘일에 대한 태도’에 대해 한국, 미국, 일본, 독일을 비교해보면, 한국의 일중독현상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본과 독일 사람들은 가족과의 시간을 1순위로 꼽은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족스런 일자리’를 꼽았습니다. 한국 사람에게는 자나 깨나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 가운데 다가오는 긴장과 스트레스로 그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건드려도 분노를 하고 미움이 생기고 다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대화가 부족합니다. 만인이 만인을 상대해서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정말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합니까? 우리는 남의 말은 안듣고 자기말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자기가 하는 말을 남에게 설득시키려고 하지 남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해가 오해를 쌓고, 분노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12장 16절에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했는데 오늘날 우리는 수욕을 참지 못합니다. 미련하니까 당장 분노하고 미워하고 분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마음에 미움의 씨앗이 되고 분노로 폭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포용으로만이 쓴물이 달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으로 다가오는 미움과 분노의 쓴물을 달게 하지 아니하면 그 독이 우리 영을 죽이고 마음을 죽이고 육체를 죽이고 생활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미움이 사라지고 분노가 사라지고 마음속에 사랑과 평화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를 끌어 안을 때 십자가를 통한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만이 우리 마음을 해독시키고 변화시켜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매일같이 십자가 밑에 나와서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주님께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 마음을 해독시켜 주시고 변화시켜 주셔서 미움과 분노 대신에 사랑과 인내를 주십니다. 십자가를 마음속에 두지않으면 미움의 쓴 연못물을 달게 할 수 없습니다.
2. 공포와 불안의 쓴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에 생기는 쓴물은 공포와 불안의 쓴물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공포와 불안을 느낍니다. 어린 아이는 세상에 태어날 때 두 가지 공포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높은데서 떨어지는 공포와 큰 고함소리의 공포가 그것 입니다. 그런데 자라나면서 이것은 다른 형태의 공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큰소리가 아니라 비난과 비평 받는 데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조차 아내는 남편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을까 불안해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을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공격을 받을까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요사이는 인터넷에 악플들이 많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열면 홈페이지에 칭찬도 있지만 온갖 욕이 다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비난하고 비평하는 데에 굉장한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38편 11절에 보면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은 인정을 받으면 굉장히 좋아합니다. 가정에도 남편이 부인을 인정해 주면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고래조차도 칭찬받으면 춤을 추고 사람들도 칭찬을 받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웃을 칭찬하고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늘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남의 결점을 찾는 것은 대단히 나쁜 습관으로 자기도 좋지 않고 남도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고 버림받는 불안을 가지고 있고 또 삶에 실패할까 패배할까 하는 불안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혹시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하는 불안증이 마음속에 가득하고 ‘패배하면 어떻게 할까’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질병과 죽음에 대한 불안이 그림자처럼 다가옵니다. 언제 무슨 병이 들지 모릅니다. 요사이는 비만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성인병이 많습니다. 고혈압, 신경통, 심장병, 관절염, 암 등 온갖 질병이 언제 내게 다가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쓴물을 청산해야 됩니다. 그러면 매일같이 찾아오는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어떻게 청산합니까? 매일 매일 십자가 밑에 나가서 주님을 바라보면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불안과 공포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를 도와주시고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신다’라는 신념을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성령의 은혜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다른 무엇으로도 달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예수 십자가를 끌어 안으면 내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나를 품어 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나의 불안과 공포를 부르짖을 때 하늘에서 평화가 우리 마음을 점령하고 비로소 우리 마음이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열등의식의 쓴물
우리의 가슴 속에 늘 생기는 쓴물은 열등의식의 쓴물입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뽐내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열등의식 때문에 그것을 덮으려고 으스대는데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열등의식은 우리 마음속에 굉장한 고통을 줍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성장기에 대한 열등의식은 반사회적 반항의식을 가져옵니다. 나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사람에 대해서 열등의식을 느끼고 반항심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독재자’로 불렸던 돌푸스 수상은 나치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한번은 신문 기자가 돌푸스 수상의 어머니를 인터뷰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역시 키가 135㎝의 단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아들은 결코 야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돌푸스는 소년시절 목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너처럼 키가 작은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되겠느냐’고 놀려댔습니다. 돌푸스는 그때부터 열등감을 갖기 시작했고 결국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서 정치계로 뛰어들어 독재자가 되어 어마어마한 독재를 행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열등감은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 있으면 성격과 기질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국가적인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5000년 역사 가운데 중국 사람들에게 수없이 침략을 당하고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중국에 대해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36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당했기 때문에 언제나 일본에 대해서 열등의식, 좌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일절과 광복절만 되면 일본에 대해서 분노를 퍼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분노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늘 품고 살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과거 중국에 의해 우리가 당했던 설움도 잊어 버려야 하고 일본에게 침략을 당해서 우리가 고통을 당했던 것도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은 하되 감정적인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은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는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과거사의 수치를 지금까지 연속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십자가 밑에 나와서 십자가를 끌어 안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혈의 역사로 다 씻을수 있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열등의식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열등의식이 없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은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고 하늘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사람인데 무슨 열등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 십자가를 끌어 안으면 열등의식의 쓴물이 달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같이 열등의식이 안 생길 수는 없지만 이 열등의식의 쓴물이 십자가를 통해서 달아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4.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
인생을 살면서 생기는 쓴물이 좌절감과 낙심입니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부인이 죽은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금도 그 방안에 부인의 사진과 유품을 고스란이 두고서 밤낮 사진을 쳐다보고 울고 직장도 갖지 않고 술을 마시고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 부인을 잃어버린 슬픔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한 두 마디 동정을 하지만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고 10년이 가까우니 이제는 넌덜머리를 냅니다. 언제나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을 마시고 있으면 그 인생은 파괴됩니다. 지나간 것은 뒤로 던져 버리고 잊어야 합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 밑에 나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옛날 삶에 붙잡혀서 눈물 흘리며 지내고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을 마시는 것은 자기의 무력감을 늘 마음속에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열 정탐꾼은 가나안 족속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우리를 비교하면 우리는 메뚜기”라면서 메뚜기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뚜기가 사람하고 어떻게 싸웁니까? ‘나는 못한다. 나는 안된다. 할 수 없다. 나는 죽는다’고 말하며 물러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기쁨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고 하루에 만 번만 기쁘다고 말해 보십시오. 기쁨이 솟아납니다. 약한 사람도 ‘나는 강하다. 나는 강하다. 나는 강하다’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100번씩 하루에 300번만 외워 보십시오. 연약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항상 자기의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을 마시는 사람들은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화상을 바꿔야 됩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빌립은 5000명 남자와 수만명 부녀자들을 보고 ‘못 먹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먹인다’고 말했습니다. 빌립은 ‘광야라서 못 먹이고, 돈이 없어서 못 먹이고, 사람이 많아서 못 먹이고, 떡 살 곳이 없어서 못 먹인다’고 했지만 안드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일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기 때문에 먹일 수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빌립은 못 먹였으나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를 끌어안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주님이 모든 일에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를 영원히 멸해 버리셨기 때문에 예수님 계신 곳에는 부활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했습니까?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사업이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이 망했습니까?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가정이 회복됩니다. 마음이 절망적입니까?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마음이 치료됩니다. 실망했습니까?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소망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끌어 안으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치료하시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항상 쓴물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미움과 분노의 쓴물, 불안과 공포의 쓴물, 열등의식과 좌절감의 쓴물을 마시고 살면 실패합니다. 우리는 쓴물을 변화 시켜야 합니다. 이 쓴 마음의 샘물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 안으면 쓴물이 즉시로 달아지고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안과 희망의 샘으로 변화되고 삶은 행복이 넘칩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 앞에 나와서 씻고 십자가를 우리 마음속에 끌어 안으면 우리 마음의 모든 쓴물은 달게 되고 변화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변화의 기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추한 것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가난에서 부요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목이 말라 허덕이다가 쓴물을 마시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십자가를 끌어 안으면 모든 쓴물은 달아지고 기쁨이 넘치고 소망차게 되고 즐거워지고 용기백배해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한 영광 십자가가 나를 위한 치료의 샘물인 것을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 광야같은 세상을 지나면서 매순간 마음속에 쓴 연못 물이 생겨납니다. 미움과 분노의 쓴물, 불안과 공포의 쓴물, 열등의식과 좌절감의 쓴물을 마시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 쓴물을 마시지 않고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는 십자가를 끌어안게 도와 주시옵소서. 십자가 앞에 나가서 주님께 부르짖으면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으로 모든 쓴물이 달아지고 오히려 쓴 경험이 우리에게 축복의 단물이 된다는 것을 알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