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

마음의 평화

by 삶의언어 posted May 14, 2024 Views 57 Replies 0
?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ESCClose

Larger Font Smaller Font Viewer Up Down Go comment Print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마음의 평화"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 가정의 평화는 그 가족들의 마음속에 평화가 있어야 가정에 평안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속에 불안과 초조, 절망, 공포 이런 것이 끓어오르고 있으면 가정의 평화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끊임없이 평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정치가들마다 세계적으로 모두 다 평화, 평화하고 있지만 사실 평화가 있나요? 전쟁과 전쟁 소문이 나고 열전을 하고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세계 인류들의 가슴속에 평안이 없는데 어떻게 세계에 평화가 다가올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사람도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인생의 참 기쁨을 향유할 수도 없고 행복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물질이 있으면 기쁘고 행복할 것이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가 있으면 내가 기쁘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대단히 계산착오인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평안이 없는 이상 이 세상에 부귀영화 공명을 아무리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행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는 거기에 부귀 영화 공명이 있으면 그것은 플러스 알파의 행복에 보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의 가장 기본 조건은 마음속에 평화입니다. 내가 잠자러 들어갈 때 편안하게 들어가고 아침에 깨어 일어날 때 마음이 편안하고 내가 밥상에 앉을 때 마음이 평안해서 밥상을 대하고 이 얼마나 가장 중대한 행복의 기초적인 요건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평안이 없는 행복은 다 거짓된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 이상 마음에 평안을 얻어야 되겠는데 마음의 평안을 어떻게 얻을 수 있나요? 오늘 저는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여러분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마음의 평화를 갖기 위해서는 죄책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치고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크고 작은 다른 건 있을지 몰라도 죄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담이 처음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자 즉시로 느낀 것이 죄책의 벌거벗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죄책에 쫓겨서 그들은 황황히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그리고 이 죄책을 호도하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치마를 엮어서 아무리 입어도 죄책이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이것은 우리의 체험 속에도 들어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를 지으면 즉시로 양심이 벌거벗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던 지간 내 양심 앞에서 내가 벌거벗게됨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쫓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와 초조에 쫓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찢기는 삶을 사는 사람이 평화를 가지고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아의 속에서 양심이 정죄함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양심을 피하기 위해서 혹은 술을 먹어보기도 하고 혹은 이 세상에서 방탕하게 살아보기도 하고 양심의 소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양심에 쫓기는 이상 양심의 소리를 죽인다고 해서 그 마음속에 쫓기는 삶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에 불안하고 공포에 들어찹니다. 또 죄를 지은 사람은 타인이나 법에 잡힐까 싶어서 끊임없이 긴장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일만 생겨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고 가슴이 쿵쾅 뛰고 그만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불안은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아무리 무신론자라도 하더라도 그가 등 따뜻하고 배부를 때는 몰라도 그렇지 않고 천재지변이 다가오고 자기의 환경 가운데 환난과 시험이 다가오고 잘못되고 가족 가운데 병이 들고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이야말로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구나 채찍을 받는구나 마음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초조와 불안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므로 성경은 말씀하기를 "대개 악인에게는 그 마음에 평강이 없다"고 성경은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죄악의 문제는 지식으로나 학문, 제도로나 이런 것으로는 해결이 안됩니다. 이것을 오직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여러분과 나에게 위대한 구원을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 독생자를 우리 대신 보내셔서 십자가에 여러분과 나의 일생의 죄와 그 죄책을 책임지고 못 박히게 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영원한 하나님으로써 요?한 인간을 위해서 그는 몸 찢기고 피 흘려서 그 극심한 고통을 통하여 여러분과 나의 일생의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청산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이제 누구든지 주님께 나와서 그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죄의 대속 제물로서 받아들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나의 죄의 청산으로 받아들이고 의지하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양심이 잠잠해집니다. 양심이 죄의 벌거벗음에서 덮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놓여남을 받을 때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와서 비로소 이 뱃속에서 무언지 모르게 세상에 있음에 체험하지 못한 평안이 강물처럼 출렁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간증을 합니다. 불안과 초조와 절망 가운데 교회 왔다가 교회에서 설교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눈물을 흘리고 죄를 회개하고 통회하고 예수를 믿고 난 다음 교회밖에 나가는데 그 무언가 전에 도저히 체험해 볼 수 없는 그러한 평안이 마음속에 출렁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편에 강도 한 사람, 좌편에 강도 한사람이 동시에 못 박혔는데 둘이 다 예수님을 향해서 욕을 하고 예수님을 모함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편 강도의 마음속에 번쩍 전광석화와 같이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좌편 강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는 아프고 괴로우니까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렇다면 너도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우리도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라." 고함칠 때 우편강도가 꾸짖었습니다. "야 이 사람아 너와 내가 동등한 고난을 당하면서 우리가 당하는 이 십자가의 형벌은 마땅히 우리 죗값으로 당하거니와 저분은 일생에 좋은 일밖에는 한 것이 없다. 주님이시여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즉시로 예수께서 그 사람의 죄책을 다 인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오늘날 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우편강도는 그 양심에 죄책을 느꼈고 또 법에 잡히었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죽을 때 그 말할 수 없이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불안과 절망 속에 있었으나 예수님의 말을 듣자 마자 육체는 비록 십자가에 못 박혀 괴로워도 그 마음속에 양심이 평안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은 하나님께 용서와 용납을 받았다는 것, 태양같이 빛나는 그 따뜻함이 꽉 들어차게 된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당하나 그 마음은 큰 평안과 기쁨으로 이 세상으로 떠나 낙원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의 근원적인 평안은 예수 앞에 나와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내 양심과 화목하고 그래서 성령이 우리 마음을 점령하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의 마음속에 참 평안을 가질 수 있는 기초적인 여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 품에 안기지 않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평화라는 것은 살얼음과 같습니다. 일시적인 평안으로 얼마 있지 아니하여서 산산 조작이 나고 그리고 물에 풍, 절망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인위적인 평화인 것입니다.

둘째로, 여러분께서 참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안 다가올 수가 없습니다. 남편 문제, 아내문제, 자녀 문제, 생활 문제, 일가 친척 친지 문제, 이 세상에 살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그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짐을 안 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짐을 없애려면 무덤에 가는 도리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짐을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은 평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이 꽉 들어찼는데 여러분 어떻게 마음이 평안할 수 있습니까? 저도 염려와 근심이 저의 양심을 짓누르면 밤에 잠을 못 자요. 먹은 것이 소화가 안되고 밤새도록 이리 뒤치럭, 저리 뒤치럭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빌립보서 4장 4절로 7절에 "너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염려가 꽉 들어찬 세상에 염려하지 말라니요? 그 무슨 말씀을 하시옵나이까?" 하나님께서 너희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실 때 그 염려를 책임져 주겠다는 생각 없이 말만 그렇게 하시겠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짐을 안 맡아주고 입발림으로만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염려와 근심을 다 주께 맡겨버리라 그리하면 저가 너희를 돌보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염려와 근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가스가 꽉 들어찬 방에 살면 질식해서 육체가 죽는 것처럼 마음속에 안개구름 같은 염려와 근심이 피어오르면 그 영혼이 질식해서 죽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어떻게 맡길까요? 성경에는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너희 아뢸 것을 하나님께 다 아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저도 이 세상에 살면서 무던히나 염려와 근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는 원래 성경이 그리 활달하게 태평양처럼 탁 넓지를 못하고 뭐 하나 염려근심을 할 땐 그것을 해결할 때까지 늘 고통을 합니다. 괴로움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신앙이 깊기 전에는 우리 집사람하고 한번 입싸움이 붙으면 그걸 일 주일이고 이 주일이고 늘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아침에 자고 나도 '그럴 수가 있느냐.' 점심때도 '그럴 수가 있느냐.' 저녁에도 '그럴 수가 있느냐.' 내 마음속에 그럴 수도 있다라고 한 다음에도 '아니야, 아니야 그럴 수가 없어.' 왜 그런 것도 활달히 탁 주께 맡기면 되는데 저는 성경이 원래 좀 그렇게 약합니다. 이래서 염려와 근심이 다가오면 견디지 못해요. 염려와 근심을 하는 사람들 보면 대번히 표납니다. 얼굴에 광채가 사라지고 얼굴이 홀쭉해지고 염려와 근심을 뼈를 마르게 합니다. 사람 뼈가 말라요. 그런데 신앙이 깊어지고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이제는 하루도 염려와 근심을 저의 속에 두지 않습니다. 염려와 근심 없는 세상 있나요? 우리가 수풀을 지나가면서 나무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을 살면서 염려와 근심의 숲 속을 지나지 않고야 살수가 없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 주님이 계신 이상 이제는 모든 염려와 근심을 기도와 간구로 아뢰서 주님 손에 맡깁니다. 주의 손이 어디에서 보여야 맡기지요. 주의 손이 바로 하나님의 약소의 말씀이 주의 손인 것입니다. 최근에 와서는 제가 남에게 공격을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그 아주 무리하고 무자비하게 그리고 거짓말로 참말이 보탰으면 받아나 주지, 거짓말로 공격을 할 때 마음에 굉장히 속이 상합니다. 그럴 때는 저도 사람이니까 속이 안 상할 턱이 없어요. 그러면 주님께 나와서 주의 말씀이 바로 주의 편 팔입니다. 내 생각에 '아, 이것들 뭐 큰 벼락이 때리면 좋겠다. 하나님이여 저거 나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주먹은 주먹으로 그렇게 해볼까요?' 그러나 성경말씀 가운데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네가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라. 이게 하나님의 손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회개시키고 주님께서 징계할 것 징계하고 주께서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해서 그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맡기면 마음이 후련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왜? 염려와 근심을 주께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여러 가지 교회에 대해서 협박과 공갈이 다가오고 교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을 할 때 그것도 마음의 짐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했습니까? "전쟁을 여호와의 것이라 오늘날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라"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 평화의 하나님 뿐 아니라 또한 전쟁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주를 따르는 사람에게 평안을 주시지마는 하늘나라를 대적하는 자에게는 전쟁하는 용사로써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라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라 하나님의 교회나 성도를 대적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도전장을 던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맡으십시요. 나는 못 맡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도전장을 던진 사람은 하나님이 나가서 맡을 것이지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못 맡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쟁을 맡으시옵소서. 기도하고 나면 이 모든 문제가 다 맡겨지고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육신이 질병이 병들어서 괴로울 때도 성경은 말합니다. "저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고 하셨기 때문에 주님 이거 하나님 팔 아닙니까? 주님께서 나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고 했으니 이 말씀 위에 내 병을 맡깁니다. 이 말씀 위에 내 연약함을 맡깁니다. 주께서 나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단 이 약속에 내 병을 다 맡기오니 맡아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 마음속에 허공을 향해서 손을 흔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딱 가지고서 하나님 이 말씀에 나의 이 기도를 맡깁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내 이 짐을 맡아 주시옵소서 할 때 말씀은 여러분의 짐을 맡아주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성경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맡겨야 맡겨질 수 있습니다. 옷을 벽에 걸 때 옷걸이가 없는데 아무리 옷을 걸어봤자 옷이 떨어집니다. 옷걸이 위에 옷을 걸어야 되는 것처럼 말씀의 옷걸이 위에 여러분의 염려와 근심을 벗어서 걸어버리면 거기에 철컥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맡겨라하기 때문에 맡길 때 주의 약속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염려와 근심을 벗어서 걸어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계속 기도하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시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느니라"고 했는데 우리 인간의 이성이나 감각을 초월해서 그래서 자꾸 기도하고 있으면 마음이 갑자기 편안해집니다. 이성과 감각으로써는 생각할 수 없게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맡아버리시면 평안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거는 저러고도 걱정 근심 안 하느냐? 저거 예수 믿고 난 다음 완전히 돌았구나." 그렇게 말할 정도로 마음속에 편안해서 얼굴에 광채가 나고 뼈의 썩어짐이 없어져서 윤기가 흐르고 즐거움이 생활에 꽉 들어차는 것입니다. 평화가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매일같이 매순간마다 내어 맡김으로 말미암아 내가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질식하지 말아야 비로소 마음속에 평안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주님께서는 실제로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짐을 짊어져 주시고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평안을 주시는 살아 계신 좋으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셋째로, 여러분이 마음에 평안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족함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족함을 배우지 못하면 이 세상의 비교 가난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저 우리가 지금 우리 사는 형편을 보면 옛날에 제가 초등 학교 다닐 때 촉은 목표로 살고 일제시대 대두박을 먹고 퉁퉁 부어서 살던 그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입쌀밥 먹고 따뜻한 방에 자면서도 오늘날 나는 못산다. 못산다. 또 한국의 잘사는 사람 생활 수준을 일본이나 미국에 비교하면 또 못삽니다. 비교 가난은 언제까지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현실에 만족할 줄 알고 자족할 줄 알아야 돼요. 그러므로 없는 것을 보지 말고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알 때 그럴 때 마음의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아이구 내 팔자야, 나는 왜 이렇게 못사나 신랑을 잘못 만나서 그렇구나. 아이구 마누라를 잘못 만나서 그렇구나. 조상 잘못 만나서 그렇구나." 이래서 자꾸 남의 원망하고 남과 자기를 비교하면 안됩니다. 있는 것으로 만족할 때 그 때 하나님이 더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조차 빼앗겠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로 13절에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에 바울 선생은 비천할 때 배고플 때 궁핍할 때 그때 열등의식이나 좌절감을 갖고서 원망, 탄식하고 쓰러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현재에 비천하고 배고프고 궁핍할 지라도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으시고 도와주심이 있고 이 세상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잠시 잠깐 후면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지나쳐 가버릴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그 위대한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풍부할 때 배부를 때 교만하거나 방탕하지 않고 이 세속에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도 이 세상에 풍부하거나 배부른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온 것이지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한마디면 이거 다 안개와 구름같이 다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무언지 영원히 내가 이것이라고 이지하고 자랑하고 으스댈 만한 일이 없는 것을 알고 풍부하고 그리고 배부를 때 겸비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감사하고 찬미하고 그 풍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면서 살아나갈 때 자족함을 배우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풍부해도 풍부한 것을 가지고서 감사할 줄을 모르면 이것은 그로 말미암아 불평과 원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 바울 선생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중신으로 섬기고 이 세상을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빛은 배고픔, 궁핍할 때도 그로 말미암아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의 풍부하고 배부를 때도 그로 말미암아 교만하거나 타락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주님 안에서 감사하면서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가만히 저의 과거생활을 돌이켜 볼 때 처음 예수 믿고 신학 공부하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와서 그때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는데 겨울에 우리 최자실 목사님 버선 빌려서 버선 신고 그리고 난 다음에 내복 없이 여름 옷 입고 아주 그 어려운 생활을 살았는데 그리고 개척 교회할 때 상당히 많은 그 배고픔과 설움을 당했는데 그런데 그때 서럽다고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생활 가운데도 아주 자족함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내일의 희망이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는 안 버린다. 나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사는데 너희들 세상 사람이 날 인정하든 안 하든 아무 상관없다. 이러한 마음의 평안이 그때 아주 넘치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때 비교하면 지금 저야 얼마나 환경이 좋습니까? 그래도 내가 요사이 내 스스로를 속을 들여다 볼 때 내가 옛날에 궁핍할 때는 오늘날 환경이 좋아서 잘 살 때나 내 마음속에 주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과 자족함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이 내 구주가 되시면 이 모든 일에 내가 능히 이겨나갈 수 있고 평안을 가질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자족함을 배우십시요. 있는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요.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만족함이 다가오고 감사가 다가오고 그 때 평안합니다. 늘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늘 남에게 비교해서 늘 원망, 불평, 탄식하면 늘 가난하고 늘 괴롭고 늘 고통스럽고 평안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시기, 질투, 분노를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남을 부러워하고 그것이 지나서 시기, 질투, 분노로 변화되면 무서운 파괴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를 가지고 있으면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고 이가 갈리고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그리고 난 다음 얼마나 남 잘되는 것이 마음에 고통스럽고 괴로운지 모릅니다.
야고보서 3장 13절로 16절에는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여기 보십시요. 시기와 다툼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함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 평화가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분노한다고 해서 자기가 나아지는 것 없습니다. 시기와 다툼으로 말미암아 남의 내 몫 먹는 밥에 재나 뿌려보자. 남 걸어가는 길에 장애물이나 놓아 보자. 이래서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기도 상처 입지 마음에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내게 말할 것입니다.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행위를 보고도 시기와 분노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란 말인 것입니까?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행위를 고치는 길은 사랑과 대화를 통해서 고쳐야지 시기와 분노를 가지고서 악의로 대하면 상대도 시기와 분노를 가지고 악의로 대하기 때문에 무서운 분쟁과 파괴밖에 얻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 야고보서 3장 17절로 18절에는 "오직 위로써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하나님이 주신 언어는 화평입니다. 평안입니다. 마음이 시기와 분노가 끓어오르는 가운데는 하나님의 지혜나 지식이나 하나님의 분별력도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파괴의 손에 잡히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도 하나님께서 같이 계실 때는 마음에 화평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 화평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분별력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도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평할 때 만사가 이루어진단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평화가 있을 때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그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시기와 분노와 질투와 악한 다툼을 예수 이름으로 모두다 회개하고 보혈로 씻고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채워 놓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럴 때 마음의 평화가 다가옵니다. 이 평화는 여러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은이나 금이 아무리 있어도 평화가 없으면 이것으로써 기쁨이나 행복은 절대로 살 수 없습니다.

다섯째로,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때 성령의 위로를 통해서 평화가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했는데 이 보혜사란 말은 곁에 부름을 받아서 항상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온 위로자란 말인 것입니다. 성령님의 가지시는 가장 위대한 특징은 위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 마음속에 기도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로가 오는데 보통 때는 그 위로를 느낄 수 없으나 위기에 처할 때 상처 입었었을 때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마치 큰어머니의 품 같이 안아주는 것입니다. 몸에 상처 입은 사람이나 아픈 사람은 솜털로써 푹신푹신해서 눕혀 놓으면 덜 아픈 것처럼 여러분 성령의 위로가 마음을 품어주면 그 위로가 마음속에 강물같이 넘치기 때문에 울면서 웃고 고통 당하면서도 평안한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무더기에 들어갈 때 돌팔매에 맞아서 온 머리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고 창자가 터져 나오면서 그가 평안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러면서 무릎을 꿇어 죽기 전에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옵소서. 내 영혼을 주게 맡기나이다." 이것은 초인적인 것입니다. 스데반이 잘나서 그런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위로가 그 마음속에 가득했기 때문에 그 너무나 큰 위로에 잡히고 나니까 미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 증거 하다가 잡혀서 많이 얻어맞고 빌립보의 깊은 옥에 잡혀서 차고에 ... 허기가 지고 춥고 상처 입은 곳이 쓰라린데 빈대 벼룩이 기어오르고 기가 막합니다. 그런데 밤중에 그들이 둘이 기도하고 난 다음에 성령의 위로가 얼마나 컸던지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하나님의 위로가 강물처럼 넘치니 그들이 큰 기쁨으로 찬송하는데 죄수들이 그 빌립보 감옥에 가득 있는데 모두 다 밤에 깨어나서 그들의 찬송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극악한 죄수들이 밤중에 찬송 부르는데 "야 이 놈의 자식들아 잠도 안 자고 무슨 소리냐. 잠잠해라. 잠잠해" 이렇게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과 실라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이 얼마나 성령으로 충만했던지 위로로 충만했던지 안 믿는 극악한 죄수들이 모두다 고요하게 밤중에 자다 깨서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감동해서 그 손으로 빌립보 시를 흔들어버리니 빌립보의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 문이 열리고 차고가 끌리고 기적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는 감옥에서 해방 얻는 기적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위로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구역님 한 분의 간증을 들었는데 구역님께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가 내리막길을 달려가다가 갑자기 운전사가 고함을 치더랍니다. "한돌 핀이 빠졌다." 내리막길에 만원 버스가 내려가다가 한돌 핀이 빠지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은 겁니다. 막 곤두박질치면서 버스가 막 굴러가는데 온 버스 안에 탄 사람이 다 "아이구 어머니, 아이구 아버지 나 살려" 고함치는데 이 분 말이 갑자기 어디에서 내려오는지 그렇게 큰 평화가 영혼을 점령해버리더랍니다. 막 버스는 곤두박질치고 내려가는데 그리고 사람들이 막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고 머리가 깨어지고 팔 다리가 부러지고 하는데 그 마음속에 도저히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이 확 들어차는데 뭐 그 생각에 '아이고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 이렇게 평안한데' 그래서 동요하지 않고 좌석을 딱 잡고 정신을 차려 가지고서 편안하게 있었습니다. 그 버스가 내리막길을 다 달려서 그냥 거름 창에 쳐 박혀버렸는데 다른 사람들 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크게 상처를 많이 입었는데 이 분은 마음이 평안하기 때문에 그 앉은 데로 앞자리만 딱 잡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상처 없이 그대로 툭툭 털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게 와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음의 그런 평화는 항상 있으면 좋겠는데 왜 항상 있지 않고 버스 고장 날 때만 있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가 항상은 필요 없지 않느냐. 위로라는 것은 상처 입을 때 위로가 필요하고 고난 당할 때 위로가 필요하지 항상 그렇게 위로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므로 이제 또다시 버스 고장날 때는 또 위로가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 말을 했습니다만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고 있으면 적은 어려움은 적은 위로가 오고 큰 어려움은 큰 위로가 와서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의 어려움은 능히 파도 위를 타고 지나갈 수 있는 평안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삶의 무서운 경쟁, 정신없이 돌아가는 템포, 일의 중압과 스트레스 등 어디를 봐도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만이 가득찬 세계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스트레스를 피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태풍이 아무리 요란해도 바다 밑 10m 이하에는 조용하다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숙이 그리스도안에서 얻은 이 평화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 환경 가운데 변화무쌍하게 요란스럽게 천지개벽이 되어 간다고 할지라도 여러분과 나의 중심이 평안에 꽉 닻을 주고 요동치 아니하고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갈 때 여러분은 어떠한 환경이든지 기쁨을 얻을 수 있고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마이너스 인생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다시 인생을 살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일방통로요, 막 한번 지나가고 돌아오지 못합니다. 인생을 살 동안에 참 기쁨을 가지고 참 행복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한번밖에 못사는데 일회적 사건으로서의 삶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는데 여기에 늘 불안과 초조로 울면서 몸부림치며 살다가 가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 올라가서 인생을 산 성적표가 마이너스 성적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 세상에 살 동안에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내가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큰 기쁨과 행복으로써 인생을 살 때 삶이 가치 있게 되고 그리고 나중에 천국 올라갈 때 여러분 후회 없이 즐거움을 가지고 주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시는 이 평화는 누구든지 다 얻을 수 있습니다. 금이나 은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대로 여러분께서 실천하므로 마음에 평안을 갖고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고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알렉산더 대왕이 30세에 세계를 정복하고 난폭하게 살았지만 그 마음에 평안이 없이 긴장 가운데 살아서 아버지 33살에 죽고 말았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 삶을 가장 값지게 하고 부유하게 하는 마음의 평화를 예수님 안에서 얻게 도와 주시옵소서. 이 은혜를 주신 우리 아버지 감사 하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