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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이 있더라

by 삶의언어 posted May 26, 2024 Views 1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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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큰 기쁨이 있더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휘발유가 자동차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는 것처럼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근원적인 동력은 바로 마음의 기쁨인 것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전적인 마음의 슬픔과 우울증으로 채워져 버리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만나기를 원하지 않고 활동하지도 아니하고 숨어살고 그리고 자살하기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쁨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용기와 힘이 되는 것입니다. 기쁨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기고 또 활발하게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기쁨은 여러분과 나에게 건강을 가져오는 근원적인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서 17장 22절에 보면 "마음에 즐거움은 양 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나아가서 기쁨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상표입니다. 우리가 다니면서 예수 믿으십시오. 믿고 영생과 천국을 얻으십시오. 아무리 말을 해도 그 증거한 사람의 생활 속에 기쁨을 찾지 못하면 그 증거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나의 얼굴에 넘쳐나는 기쁨,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광채 나는 그 기쁨을 볼 때 사람들은 여러분 입에서 나오는 그 증거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바울 선생은 빌립보서에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세상에 우리가 어디에서 이와 같은 기쁨의 원천을 발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모든 사람들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느 정도 기쁨은 발견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와 같이 위대한 삶의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기쁨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읽은 성경 말씀 가운데 보니 사마리아 성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있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니 그들이 일심으로 그 전하는 말씀을 듣고 그 행하는 표적도 보고 또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귀신이 소리치며 나가고 많은 절름발이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작은 기쁨이 아니라 큰 기쁨이 그 성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얻은 그 기쁨의 비결을 오늘 여러분과 저도 얻어 보십시다.

첫째로, 어떻게 사마리아 사람이 기쁨을 얻었나요? 그들은 말하기를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매 이를 듣고 일심으로 그를 따를 때 기쁨이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을 전할 때 마음에 기쁨이 왔을까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 이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철학 이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고 우리를 속박의 세계 속에 밀어 넣은 이 모든 곳에서 우리를 자유케 해 주고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정 36년만에 해방된 그 날에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6.25 사변 때 우리가 거의 부산과 대구만 남겨놓고 다 점령당했다가 유엔군의 도움과 우리 국군의 반격으로 말미암아 침략자를 물리치고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마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진실로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속박 당하고 짓밟히고 잃어버렸던 그 참 생명을 예수로 말미암아 얻게 될 때 얼마나 마음속에 넘치는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매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다가오는 것처럼 이 시간에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것을 듣고 따르는 사람에게 큰 기쁨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다가오는 이유를 제가 말씀해 드리지요. 왜냐하면 영혼이 죽으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그 복음을 듣고 건져냄을 받기 때문에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꾀임에 빠져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 실과를 먹고 죽었습니다. 육체가 당장 죽은 것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져서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의 대화는 끊어지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샘물에서 끊어진 개천은 그 자리에서 썩어지고 마는 것처럼 인간은 그 영이 벌써 하나님과 끊어져서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 죽은 영이 살아나고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되고 우리의 생애 속에 영생이 들어오고 성령이 들어오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5장 17절에서 19절에 보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많은 사람들이 다 죄인 되었는데 예수 한 사람의 순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한 사람으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 안에서 찾아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소식을 들을 때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며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들 죄 값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종이 되고 그리고 마귀의 종이 되었던 종살이에서 우리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종살이에서 해방을 얻고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진 바 되고 그리고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이 소식을 듣고 난 다음 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들을 때 우리의 생활 가운데 가시와 엉겅퀴처럼 돋아나는 저주와 수고에서 우리가 해방을 얻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기뻐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서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아담이 상속으로 받은 땅을 저주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세상에 어떠한 비극적인 스토리보다 하나님이 아담의 땅을 저주한 이 이야기 이상 더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모든 희망은 다 사라지고 인간의 삶은 절망 가운데 부딪치고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하늘에서 폭풍우같이 휘몰아쳐 왔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인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며 전쟁과 전쟁소문 속에 요란한 세상 가운데 인간의 역사는 피로써 적은 역사의 페이지 페이지를 이루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저주와 절망 가운데서 누가 우리를 건져낼 수 있습니까? 사람은 죄책과 정죄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과 절대 무의 절망에서 공동묘지에서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절망적인 상황, 이 저주에서 누가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될 때 이 저주에서 우리를 벗겨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처음 아담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저주를 가지고 왔었으며 그 다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므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나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고 해방되게 만드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축복의 원천이신 그 분이 성경말씀 가운데 여호와의 저주를 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린다고 했는데 여호와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린 것은 처음 아담에게서 저주받은 삶을 예수께서 다 속량해주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후에 우리는 이마에 땀이 흘려야 먹고살며 수고하고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삶 속에서 마음에 새로운 믿음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긍정적인 믿음, 적극적인 믿음, 창조적인 믿음, 생산적인 믿음이 생기고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날은 전날 보다, 내년은 금년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예수를 우리는 증거 받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이 수고롭고 괴로운 땅에서 새로운 소망의 태양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여러분 이 땅에 살면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먹고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제껴버린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안아 주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를 대신해서 오늘 이 시간에도 걸며 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 소식을 들을 때 안 기뻐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께서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고 걸어가는데 강한 자가 와서 그 짐을 대신 짊어졌으면 그 마음속에 얼마나 힘을 얻고 즐겁지 않겠습니까.
나아가서 여러분 인간은 종국적으로 아담 안에서 가장 처절한 절망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사는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입니다. 영웅호걸 열사도 상관없이 공동묘지 앞에서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그래서 몸은 티끌로 돌아가 버리고 그 영혼은 영원히 버림받는 곳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운명을 인간의 어떠한 과학이나 철학이나 인간의 권력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그리고 이 세상 부귀영화 공명을 가진 어떠한 사람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2절에서 45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느니라" 예수께서 살려주는 영이 되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영원히 버림받을 우리들에게 주께서 살려주는 영이 되어 예수를 구주로 모시자 말자 여러분과 나에게 영생이 들어오고 성령이 들어오시고 하나님의 자녀된 직분이 들어오셔서, 그리고 우리 속에 예수님의 부활의 씨앗이 심어지므로 말미암아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위대한 소망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소망을 받았으니 어찌 우리가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훌륭한 집에 시집가는 처녀가 시집갈 날이 결정되고 나면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마음이 흥분하고 얼마나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시집에서 선물이 왔으면 그 선물을 만지작거리면서 얼마나 즐거워하겠습니까. 여러분과 나에게 이미 이 땅에서 영생을 하나님이 주셨고 선물로써 성령을 주셔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하나님의 주옥같은 약속의 말씀을 주셔서 이 약속을 누리면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 부활의 몸을 가지고 올라가서 예수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고 살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얼마나 즐거움이 가득합니까.
여러분 대낮에 마당에 나가서 태양을 한번 쳐다보십시오. 햇빛을 쳐다보고 난 다음에 주위 환경을 바라보면 눈이 컴컴해서 주위 환경이 잘 안보입니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영광스러운 축복을 잔득 받아보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의 부귀영화 공명이 컴컴하고 어둡고 아무 것도 우리 속에 그렇게 큰 매력으로 우리를 잡아당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너무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나아가서 아담 안에서 쫓겨난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이제는 쫓겨나는 신세에서 여러분 환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쫓겨난다는 것보다 더 슬프고 비참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쫓겨난 방랑의 삶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다시 영접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는 즐거운 일입니까.
창세기 3장 23절에 "여호와께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하나님이 예비한 곳에서 내어 쫓김을 받아서 이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걸며지고 그 많은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땅에 이마에 땀을 흘리며 그 토지를 갈게 한 그러한 운명을 받은 우리 후손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달라졌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3절에 보면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저와 함께 거처를 같이 하리라"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제 쫓겨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영접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직접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거처를 같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쫓겨난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 거처를 같이한 한 가족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과 내 안에 와서 지금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자 말자 귀신이 소리치며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귀신 이야기를 하면 현대 문명에 현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무슨 도깨비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있는 귀신을 없다고 한다고 해서 귀신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날 문명학적인 소리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있는 귀신이 없다고 눈을 막고 있으면서 귀신이 없다 귀신이 없다고 해도 귀신이 있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세계의 실상을 가르칠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인정을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귀신이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름이 더러운 귀신입니다. 도덕적 윤리적 생활적 여러 가지 가운데서 우리에게 더러운 것을 강요합니다. 음란하고 방탕하고 추악한 것을 가지고 와서 이 세상을 부패하려고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 것이 이 더러운 귀신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악한 귀신에 대한 말이 있습니다. 악한 귀신은 악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 분노 질투 싸움 이런 것을 가는 곳마다 일으켜서 한 부부간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가정을 파괴하고 형제간에 미움을 가져오고 부모 자식간에 이간이 되고 하고 이웃과 싸우게 하고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이 대결하여 일어나게 하는 것은 이 악한 귀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거짓말하는 귀신이 있어서 이 세상에 얼마나 거짓이 횡행합니까.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이것을 분별하기에 부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귀신은 이 세상에 횡행하면서 수없이 많은 거짓말을 가지고서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것입니다. 점치는 귀신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이 세상의 점치는 귀신에 의해서 인간의 불안과 초조와 공포를 일시적으로 무마해서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또 나아가서 성경에는 병들게 하는 귀신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이 귀신의 역사로 말미암아 병들어서 고통 당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영적인 세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영적인 우리의 원수는 정치 제도로써 쫓을 수 없습니다. 과학을 발전시켜도 쫓겨나지 않습니다. 지식으로써 쫓겨나지 않습니다. 왜 영은 영으로써 대결해야지 물질과 육으로써 대결해봤자 영은 웃고 마는 것입니다. 3차원의 세계의 힘을 가지고서 4차원이 영의 세계를 이길 수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온 세계는 악의 영의 세계가 있다고 요한일서에서 요한은 말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더러운 귀신 악한 귀신 거짓말한 귀신 점치게 하는 귀신, 병들게 하는 귀신, 가지가지 종류의 귀신들에게 억압을 당하고 속고 짓눌리고 끌려나가면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이런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증거할 때 죽은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넘쳐나오는 성령의 능력이 악령과 대결할 때 악령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기에 분명히 말하기를 요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안에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는 악령보다 크기 때문에 여러분과 내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리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원수 귀신을 단호하게 대결하고 내어쫓을 때 악령은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여서 쫓겨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 속에 진실로 믿음 소망 사랑과 화평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 3장 8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오셨고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지금도 마귀의 일을 멸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의 손이요. 예수님의 발이요. 예수님의 귀요. 입이 되어서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서 이 마귀의 일을 증거하고 기도하고 대적함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영적인 육체적인 생활, 환경적인 오염에서 이 세상을 정결케 하는 위대한 일을 여러분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마귀에서 해방을 받을 때 비로써 마음속에 기쁨이 다가옵니다. 왜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간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던 마귀에서 우리가 해방 얻었기 때문에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므로 진실한 기쁨은 마귀를 내어쫓음을 말미암아 우리 개인 가정 생활 사업 전체에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여기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다가오는 것은 그 가운데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았으므로 기뻐했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갈 때 그리고 귀신의 모든 훼방이 물러갈 때 그 다음 다가오는 것은 많은 절름발이와 앉은뱅이가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구자의 인생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인생에는 육체적인 불구가 있습니다. 사람이 여러분 육체의 불구가 되는 것도 그것은 대단히 슬픈 것입니다. 혹은 암으로 혹은 관절염으로 혹은 신경통으로 혹은 소아마비 병으로 중풍으로 육체적인 불구가 많습니다. 오늘날 불구자가 되어서 그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다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불구에서 놓여남을 받게 되면 그 얼마나 마음에 큰 기쁨이 오겠습니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불구에서 놓여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요 몇 일전에 마음이 대단히 괴로웠으나 그 이후로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뻤습니다. 제가 싱가폴에 복음을 증거하러 가는데 아침 7시에 우리 집에서 출발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새벽 5시쯤에 구역장 계신 곳에서 자녀들이 우리 집에 뛰어왔습니다. 구역장 부군께서 지금 병원에서 임종에 처하였으니 이제 빨리 와서 목사님이 안수 기도를 해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구역장님 부군을 안수 기도하러 가려면 싱가폴로 가는 비행기를 놓쳐야 되고 비행기를 놓치면 싱가폴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큰일났고, 그러니 싱가폴 비행기를 타자니 또 이 집에서 크게 섭섭하겠고 내가 그래서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바울의 앞치마 생각을 주셨습니다. 바울의 앞치마만 가지고 가서 얹어도 귀신이 떠나고 병이 나았다고 하는데 이 사람아 너도 수건에 기도하고 보내줘라. 그래서 무릎을 꿇고서 이 시간에 성령이 와서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손수건을 제가 내여서 손수건에 간절히 기도하고 이 손수건을 가지고 가서 아픈 사람 몸에 얹고 기도해 주라고 했는데 그러고 난 다음 저는 내내 싱가폴에 가서 성회를 인도하면서도 내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제가 한국에 들어오자 말자 제일 먼저 물어본 질문이 어떻게 됐냐고 물었습니다. 물어보니 대답한 말이 같이 가서 그 손수건을 얹고 같이 기도한 결과 죽음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건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을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왜 불구에서 놓여남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책임을 질 목사까지라도 마음이 기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불구에서 놓여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불구보다 더 괴로운 것이 마음의 불구인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늘 분노가 끌어 오르고 좌절하고 그리고 침울해서 마음에 병이 들어있는 사람은 육체의 병보다 더 괴롭습니다. 왜 육체의 병은 사람의 눈으로 보이니까 동정을 받을 수 있지만 마음의 병은 꾀병으로 보입니다. 눈에는 안 보이는데 자기 자신은 한없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산업화 시대에 이 도시화 시대에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마음에 병이 걸려서 고통 당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속으로 한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고쳐줄 수 있습니까. 겉에 안 보이니까 가족들의 동정도 받지 못하고 이웃의 동정도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나사렛 예수밖엔 놓아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불구가 되어서 허덕이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그 영혼을 고쳐주시고 그 마음의 고통을 고쳐주셔서 믿음 소망 사랑을 넣어주시고 그 마음에 불안과 공포 대신에 확신을, 미움 대신에 사랑을, 좌절 대신에 삶의 용기를, 죄책감 대신에 용서와 의로움으로 채워주셔서 그 새로운 사람으로 일으켜 주시는 이러한 은총이 예수로 말미암아 다가오기 때문에 안 기뻐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나아가서 생활의 불구가 있습니다. 일을 하고 애를 써도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게으르고 자기 성실을 다 하지 않아서 못사는 것이야 하나님도 도와줄 수 없지만 내가 있는 힘을 다해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자며 고생하고 일을 해도 먹고살지를 못한다. 무언지 모르게 생활에 불구가 다가왔다. 그래서 이 생활의 불구를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다. 이럴 때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와서 하나님께 고하고 나사렛 예수 앞에 내 놓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도 손을 내밀어서 그 생활의 불구를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들을 아담의 타락과 결과적인 속박에서 자유케 하시고 성령을 우리 속에 보내주심을 말미암아 이와 같이 위대한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구속과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므로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얻은 이 기쁨만이 영원하고도 참된 기쁨인 것입니다.

-기도-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이 시간에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시고 빌립이 사마리아에 전도한 그리스도가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전도되고 믿어지고 우리 가운데 역사함을 감사하옵나이다.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는 것처럼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 가슴속에 큰 기쁨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가오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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