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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언약의 축복

by 삶의언어 posted May 13, 2024 Views 4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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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아브라함의 언약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는 아브라함을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을 하고 잇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함께 축복을 받는다 이와 같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 믿음의 행실을 우리가 본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당시 가나안 땅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격렬한 전쟁의 결과로 소돔 고모라가 함락이 되고 왕들은 도망을 치고 그곳에 있는 백성들과 재산이 모두다 약탈당해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그 가족도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살고 잇다가 이 전쟁이 휘몰아쳐 들어가서 그의 온 가족이 포로가 되고 재산을 다 빼앗겼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기의 집에서 기른 318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아서 밤중에 적을 습격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에 이긴 적들은 밤중에 모여서 거나하게 술을 먹고 취해서 즐거워하고 있을 때 일시에 그들을 습격해서 대파하고 그들의 군대를 전멸하고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모든 백성들을 구출하고 재산을 다 회복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롯과 그 가족들을 모두다 구출해서 의기양양하게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고향 땅에 들어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라함에게 떡을 주고 포도주를 주고 그 다음 그가 손을 들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 준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사건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깊은 뜻을 말씀해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서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은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이 나와서 떡과 포도주를 주고 축복을 해 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당신의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를 가지고 나와서 생명의 떡과 생명의 포도주로써 우리에게 주시며 축복해 주시고 축복의 언약을 맺는 것과 똑같은 사실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멜기세덱,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고 축복의 언약을 맺은 사건은 대단히 의미가 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이 시간에 우리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믿음의 자손들인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오늘날의 멜기세덱을 보내셔서 이제는 손으로 빚은 떡이나 손으로 만든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를 가지고서 우리에게 가지고 와서 축복의 언약을 맺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의 언약을 받고 축복을 받았지만 예수께서 오늘날 우리의 멜기세덱으로서 우리에게 그의 떡과 그의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축복을 해 주는 데는 어떠한 의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된 만나"라고 말씀하시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셨으며 내 살을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저 안에 거하나니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자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나를 먹지 않고 나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에 우리의 멜기세덱으로서 하늘 보좌와 그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질병, 악마에게 눌리고 저주 당하고 절망과 죽음에 허덕이는 우리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30년 동안 아무 말씀 없이 묵묵히 거하시고 마지막 3년 반 동안에 사역하실 때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절망에 처한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저주에서 해방을 주시며 영생의 문을 주님이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최후로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그 몸이 깨어지시고 그 피를 흘리셨습니다. 바로 주님의 몸이 깨어지고 피를 쏟은 이것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오늘날 주를 믿고 나오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축복의 언약을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잡히셔서 십자가에 올라가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최후의 만찬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떡을 데어서 축사하시고 주시면서 이는 내 몸이니 받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식후에 또 잔을 가지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피로써 세우는 새 언약이니 너희는 받아서 마시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성찬을 계속해서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과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몸은 어디에서 깨어지셨습니까? 먼저 예수님의몸이 깨어진 것은 바로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에 맞아 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몸이 로마 군인들의 그 무지막지한 채찍에 등허리와 가슴팍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헤쳐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온 몸 전체는 선지 피로써 물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매를 맞아 깨어진 것은 주께서 여러분과 나의 연약과 질병을 그 몸에 하나도 없이 다 짊어지고 가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통상으로 말하면 옛날 그 당시에는 사형수에게 사십에 감한 매를 때린다고 합니다. 마흔 차례를 다 때리면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요사이 여러분 우리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병을 분류하면 39가지라는 것을 나는 의학잡지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좌우간 어찌되었든 예수님께서는 그의 몸이 깨어질 때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질병을 담당했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고 저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밝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깨어진 몸은 우리에게 연약과 질병에서 놓여남을 받을 수 있는 축복의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깨어진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못 박혀서 주님께서 그 십자가에서 깨어지신 것입니다. 육신의 몸이 십자가에서 깨어진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은 무슨 언약일까요? 주님께서는 그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므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나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는 언약을 그곳에서 맺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주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사람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고생의 떡과 물을 먹어도 저주 아래 있으면 인간의 하는 일마다 다 안 되는 것입니다. 천재가 일어나고 지변이 일어나고 일이 이리 섞이고 저리 섞여서 안되면 인간의 노력으로서는 이 세상에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20세기 문명이 이렇게 발달되어서 인간의 과학이 이렇게 눈부신 발전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다가오는 태풍 하나 마음대로 옮겨놓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지 아니하시면 인간의 모든 노력이란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이 바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는다고 인간의 노력을 씨를 심는 노력밖에 안되고 아무리 뿌려도 위에서 하나님께서 비를 주고 태양 빛을 비춰주셔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하는 일에 하나님의 축복 없이 인간의 힘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실로 위에서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으로 축복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난 이후로부터는 축복은커녕 이 땅은 저주를 받아서 저주의 회오리바람과 가시와 엉겅퀴가 가는 곳마다 인간의 앞길을 막은 것입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제하여 주시고 여러분과 나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태양을 비춰 주시고 주께서 축복의 단비를 부어 주실 수 있는 언약을 어디에서 맺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주께서 못 박힌 그래서 몸이 깨어진 그 자리에서 축복의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러므로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셨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심으로 바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시고 축복하여 주셔서 차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을 받아 그는 거부가 되고 거창한 사람이 된 것처럼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나에게 맺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은 우리의 직업 뿐 아니라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언약의 표시인 것을 우리가 알고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먹을 때 이 언약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피를 흘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포도주를 받은 것처럼 예수님은 피를 흘려서 여러분과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무엇일까요? 옛날부터 성경 말씀은 생명은 피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생명을 우리에게 다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 피를 흘리고 그 육체의 생명을 주님께서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나의 죄악을 우리의 사망을 우리의 치욕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죗값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쫓겨나고 사망의 영원한 처소인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의 피를 다 쏟아서 제단의 제물로 얹어 놓으므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나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와 영원한 불의를 다 주께서 청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을 받아들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얻고 마치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사람처럼 인정을 받으며 마귀의 참소를 벗어나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말로써 다할 수 없고 계속할 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오늘날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며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 손 든 그래도 주 앞에 나올 때 주님께서 그 피로써 우리를 씻어주시기를 원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으로부터 떡과 포도주를 받고 그 다음 축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을 받고 흘리신 피를 받고 난 다음에 주님 앞에 나갈 때 우리의 멜기세덱인 예수께서 오늘 여러분과 나에게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들이 하나님 앞에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의 증거가 바로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인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도 아닙니다. 어떤 의식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만나인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광야 같은 인생을 지나면서 저주받고 병들고 죄로써 하나님께 쫓겨나고 영원한 지옥으로 멸망 받을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늘에서 생명의 만나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제 우리는 버림받은 자도 아니요 고아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 멜기세덱이 여러분과 나를 불러서 우리에게 그의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시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언약 맺은 백성인줄 알게 하시고 그 언약 위에 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미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믿음으로 나갈 때 우리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의 도적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종교입니까? 이것이 어떻게 하나의 철학입니까? 이것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도리인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배워야 할 것은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으로부터 떡과 포도주를 받고 난 다음 그대로 나가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일체의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에 의미심장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십일조는 유대인의 율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은혜시대이므로 십일조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데 십일조는 율법이 생기기 430년 전에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고 난 다음에 떡과 포도주를 받고 그 다음 언약을 맺고 하나님께 내어놓은 인간 편에서의 물질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드린 이 십일조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멜기세덱으로 인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축복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감사의 표시로써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이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은 너무 감격해서 가지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 중에 십분지 일을 내놓은 것입니다.
또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내놓은 것은 멜기세덱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한 그 언약에 대한 신뢰의 표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게 약속하시고 축복해 주신 사실을 이룰 것을 나는 반드시 믿습니다라는 신뢰의 표시로써 그는 십일조를 내놓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의미심장한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멜기세덱을 보내셔서 아브라함에게 떡을 주고 포도주를 주시고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셔서 언약을 해 주셨기 때문에 언약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 그 언약을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언약을 받아들이겠다는 증빙물을 내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내놓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축복을 받아들였다는 그 언약의 우정으로서 그는 십일조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 편에서의 언약의 증거이고 십일조는 인간 편에서의 이 축복을 받아들였다는 언약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십일조를 내도 좋고 안내도 좋다는 이런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대제사장 멜기세덱이 당신의 살을 떼어서 우리에게 주시고 몸에 피를 흘려서 우리에게 마시게 해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것을 우리가 합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그 증빙물로서 십일조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내놓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그 언약의 축복을 우리 인간편에서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 가운데 말라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네가 나의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너의 온 나라가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에게 저주를 제하시고 죽음을 제하시고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주었는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성경에는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 고향 산천을 떠나서 외아버지 집으로 떠날 때 밤에 자다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아침에 깨어나서 자기가 베고 잤던 그 돌에 기름을 붓고 기도할 때 '하나님, 내가 가는 길에 하나님이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있을 곳을 주시면 그리고 또 아버지 집에 무사히 돌아가게 해 주시면 내가 누운 이 자리가 성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체의 모든 것 중에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십일조는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내게 축복을 주시겠다는 언약에 대한 인간의 믿음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이요 증빙물인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그렇기 때문에 주의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를 우리가 먹고 마셨으면 여기에 대한 감사와 여기에 대한 신뢰와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확실히 받아들인다는 그 보증으로써 우리는 십일조를 우리의 생애 속에 반드시 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생활과 십일조라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위의 멜기세덱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보혈의 공로와 우리가 그것을 믿고 믿었다는 증거로서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인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신앙 질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넘치는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렇게 언약을 받고 그 언약을 받았다는 증거로써 십일조를 드리고 난 다음 즉시로 유혹이 다가온 것입니다.
소돔 왕이 아브라함에게 건의를 합니다. "당신이 나가서 전쟁을 하여서 우리 백성과 재물을 다 거두어 주었으니 백성만 내게 돌리고 재산은 당신이 다 가지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주는 부가 있고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 주시는 부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로 그 자리에서 거부가 될 수 있었으나 즉시로 분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부가 아니라 세상이 주는 부다. 이것은 유혹이다, 나중에 재산을 주어서 부요롭게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소돔 고모라성 왕은 말하기를 내가 아브라함으로 부요케 만들었지 하나님이 부요케 만들지 않았다. 그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손을 들어서 하나님께 언약해서 말하기를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나는 너에게 신들메 하나라도 받지 않겠다. 너는 나중에 네가 나를 부요케 만들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나는 너희 재산이나 너희 백성들을 하나도 취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다 가져 가라. 그래서 아브라함은 세상이 주는 부를 거부하고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부를 기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자기의 삶의 절대적인 자원으로 삼고 부정적인 방법으로 축재하여 자기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고 자기의 신앙도 상실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위대성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축복의 언약을 맺은 이상 이제 내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하나님이 돌보아 주실 일이지 세상의 부정한 방법으로서 내가 부자가 되어서 세상의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어서 그는 나중에 거부가 되고 은과 금이 풍부하고 짐승 떼도 아주 많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이와 같은 유혹을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오는 부귀는 그것을 받고 나면 그와 함께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부는 그것을 받고 난 후에 여호와를 경외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천국과 영생을 상실하지 않고 그대로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이제 아브라함의 받은 상급입니다.
하나님께서 곧장 이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여,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큰 상급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아브라함에게 방패가 되시고 상급이 되신다고 했는데 방패는 적의 공격에서 지켜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여 이제 내가 나를 의지하고 살아갈 동안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지켜주는 것은 시편 91편 1절로 6절에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방패와 손방패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또 우리가 사업을 할 때도 말라기 3장 11절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이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에 환경적인 저주로 말미암아 손실이 다가오지 않게 주께서 지켜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떡과 포도주의 언약을 맺고 그가 그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십일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인간의 부정적인 방법으로 축재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하나님을 그의 삶의 영원하고도 궁극적인 자원으로 삼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원해서 나오셔서 나는 너의 방패가 되어 주겠다. 손방패가 되어 주겠다고 말씀하시므로 그의 모든 생활에서 도적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당하는 것을 막아 주신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의 상급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급이 되시면 이 세상의 무슨 상급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저는 시편 23편을 읽을 때마다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상급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여호와께서 나의 상급이 되시고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내게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하나님 안에 무엇이든지 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도 땅동 세계도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친히 손수 지으셨는데 그래서 그 선물을 요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요구해서 하나님이 나의 상급이 되시면 하나님 안에 무엇이 없겠습니까? "저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비록 상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를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기름을 바르시고 주님께서 상을 준비해 주시니 내 잔이 넘친다 내 평생의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이것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상급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일어나고 앉는 곳에 상급이 되시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을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언약의 제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 맺은 증거로서 그 깨어진 몸을 받아먹고 그 흘리신 피를 받아먹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와서 우리에게 언약을 맺자고 할 때 우리가 그 언약을 받아들인 표시로써 믿음으로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축복을 받아들였으면 축복을 받아들였다는 믿음의 증거로써 보증으로써 우리 인간 편에서 증빙물로써 우리의 십일조를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하나님을 인간의 무한한 삶의 자원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축복 속에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 기 도 -
사시고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축복해 주신 멜기세덱은 이제 오늘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멜기세덱으로서 우리에게 와서 오늘도 포도주와 떡을 주심을 감사하옵나이다. 이를 먹고 마시는 우리가 십일조로서 우리 인간 편에서의 믿음의 증빙물을 제시하고 하나님을 영원한 삶의 자원으로 삼고 큰 기대와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신앙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고 상급이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루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