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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역

by 삶의언어 posted Oct 17, 2024 Views 2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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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사역"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세상 어느 곳에 가든지 사람이 사는 곳에는 절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셔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장 아름다운 환경에 두었으나 사람은 하나님을 반역함으로 그 죄의 대가로서 영혼이 죽어서 하나님께 분리되어 버리고 그는 에덴에서 쫓겨나서 육체도 살다가 죽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절망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땅은 가시와 엉걸퀴가 나고 저주를 받아 어느 곳에 가나 저주의 먹장구름이 덮이고 사람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살되 고통스럽게 태어나서 고통 속에 살다가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도록 만들어지고 말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늘날 어느 곳을 가나 이 절망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명한 철학자들도 인간을 규정하되 인간은 죄책과 정죄의 절망적인 존재며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적인 존재며 죽음과 무로 변화되는 절망적인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망이기 때문에 현재 인간은 웃고 있지만 죽음에 이르는 병에 든 사람이 웃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일시적으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든 사람이 일시적으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산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준다는 것입니까? 이미 절망적인 존재요 절망을 옷 입고 사는 것이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종교나 제도나 율법이나 윤리나 도덕강령이 아니라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수많은 선생이 있었지만은 사람에게 더 많은 종교적인, 율법적인 멍에는 세워주었지만 그 마음속에 진실한 희망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나사렛예수님만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선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산인해로 사람들이 모인 것은 사람들은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께 나와서 희망을 얻었고 그들의 삶이 새로운 광명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진실로 인류를 구원하고 살리는 복음이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절망을 젖히고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참된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무리들과 한번 인터뷰를 해 봅시다. 20세기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면 수많은 신문기자와 라디오, 텔레비전 기자들이 인터뷰를 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을 한번 여러분과 함께 인터뷰를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는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입니다. 얼굴에는 광채가 나고 그 옷을 정숙하게 아름답게 입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그 여인의 말은 이렇습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얼굴에 광채가 나고 마음에 기쁘고 희망찬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옛날에 바람기가 많은 여자였습니다. 나는 죄를 많이 지었었습니다. 한번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서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율법사들에게 개처럼 끌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죽는가 보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는 간음하다가 잡히면 돌로서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내가 끌려간 곳은 바로 성전 뜰이었고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율법사들이 나를 법적으로 나를 돌로 쳐죽이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준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먼저 돌로 쳐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청천벽력같이 들렸습니다. 모든 사람의 위선의 옷이 벗겨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주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되었고 그들의 죄가 백일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모두 다 햇빛 앞에서 도망치는 벌레처럼 예수님 앞에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 혼자 남았는데 예수께서 저보고 하신 말씀이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개를 들어보니 아무도 없는지라 정죄하는 자가 없다고 말씀드리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이제 집에 돌아가서 다시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죽음의 혹독한 절망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희망을 얻었습니다. 죄가 용서함 받고 나는 재생의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내 인생은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나는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고 내 마음속에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넘치는 평화와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앞에 있는 한 여인에게 또 물어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나는 소위 말하는 수가성 여인입니다. 나는 소위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여자지요. 결혼하고 한번 잘못된 것이니 두 번째 다시 가정을 이루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잘못되어 또 가정이 파괴되고 그것이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연속하고 나니 그 다음에는 지칠 대로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는 것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앞날에 희망이 없었습니다. 여섯째 될 대로 되라고 여섯째 남자와 살고는 있었지만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어서 대낮에 사람 없을 때 우물에 물 길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나쁜 여자, 음란한 여자, 죄 많은 여자라고 말씀하지 않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진실로 사는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이 구세주인 것을 알게 해 주시자, 내가 예수님을 믿자 말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내 속에 느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임재하시는 것을 느끼자 말자 내 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마침 시편기자가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치나이다"라고 한 것처럼 내 마음속에 생전 처음으로 그런 기쁨과 즐거움은 느꼈습니다. 평화가 강물같이 넘쳐났습니다. 나는 물동이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 길로 시내로 뛰어내려가서 '와 보라 이 분이 구주가 아니냐'고 전도했고 수많은 사람이 따라나와서 내 말을 듣고 예수를 믿고 똑같은 구원을 받았지요. 그 날 이후로 나의 생애는 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살므로 내 마음속에 넘치는 이 기쁨과 이 평안을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아주 건장한 남자가 아주 즐거운 얼굴로 서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다가 예수를 믿었습니까? 말도 마십시오. 나는 문둥이였습니다. 내가 문둥병이 걸리자 나는 가정에서 쫓겨났고 처자들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람이 드문 산이나 들에서 살았었습니다. 움막을 치고 살았고 토굴 속에 살았었습니다. 겨울에는 혹독히도 추웠고 여름에는 더웠었습니다. 벌레들에게 물렸고 온 몸은 고름주머니가 되었습니다. 사는 것이 저주였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웠었습니다. 몸은 고통스럽고 괴롭고 마음은 가족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어도 어디 가족을 만나 볼 수가 있나요. 우리 같은 문둥이는 성한 사람이 오면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서 성한 사람이 곁에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성한 사람 곁에 갔다가는 돌로 맞아 죽습니다. 나는 천명을 받고 이 처절한 절망가운데 있을 때 하루는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나는 그때가 기회인줄 알았습니다. 이제 살든지 죽든지 생사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모습 이 대로 살아서야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담대하게 성한 사람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었습니다. 성한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놀라서 손에 돌을 들었지만 나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의 외마디 부르짖음이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에게 손을 내미시고 고름이 질퍽한 내 머리 위에 손을 대시더니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말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 온몸이 불타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문둥병은 사라지고 나는 이와 같이 새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얻었지요. 그 어둡고 캄캄한 문둥병이라는 절망에서 나는 찬란한 소망을 얻었습니다. 나는 우리 집으로 돌아갔고 부모를 모시고 처자와 함께 삽니다. 이 얼마나 소망 찬 일인 것입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은 이 소망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두 자매가 서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예 나는 마리아라고 하고 나의 언니는 마르다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베다니의 빈민굴에서 살았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와서 복음을 증거 하시고 난 다음 주무실 때는 언제나 베다니의 빈민굴에 와서 주무셨습니다. 돈 없고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주셨지요. 베다니에서도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잃어버리고 우리 형제들이 가난하고 슬프게 살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집에 와서 마치 우리 부모와 같이 부형과 같이 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예수님이 요단강 건너편에 계실 때에 우리 오라버니가 병들어서 죽어버리고 말았었습니다. 우리 여형제 둘은 가장 처절한 절망에 처했습니다. 천지가 아득하고 우리는 오라버니와 함께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나흘만에 오셨는데 오라버니는 무덤에서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덤가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그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시더니 말 한마디로 죽은 오라버니를 살려서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어두움이 광명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변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가난과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나고 이제는 소망 차게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은 예수님밖에 우리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는 할머니가 내가 하나 간증하죠. 내 간증도 좀 들으십시오. 나는 나인성에 사는 한 여인입니다. 나는 일찍이 청춘과부가 되어서 내 아들 하나를 힘입고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습니다. 아들만 장성하면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 아들이 이제 제법 커서 이제는 어미의 기둥이 되어줄 만할 때 그만 병들어 죽었지요. 아들이 죽어 상여에 실려나가는 날 나는 아들과 같이 죽기로 결심을 했지요. 아들이 흙에 파묻힐 때 나도 그곳에 함께 뛰어들어가서 파묻힐 각오를 했었습니다. 나는 상여 뒤에 따라가며 울며, 울며 부르짖으며 따라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길에서 만나서 상여를 중지시켰습니다. 관 뚜껑을 열라고 하시더니 싸늘하게 식어서 뻣뻣해진 내 아들의 손을 잡고 '청년아 일어나라' 말 한 마디 하시매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나고 피가 돌더니 내 아들은 야들야들하게 되어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내 아들은 내게 효도하고 나는 내 아들을 의지하고 이렇게 살지요. 그 어둡고 캄캄한 절망이 예수로 말미암아 이런 큰 소망으로 변화되고 말았습니다. 이러니 어찌 예수님을 경배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예수께 찾아온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이 새로운 종교를 얻었다는 간증을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율법을 얻었다는 간증도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의식을 집행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나온 사람들마다 그들은 다 가지가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슬픔과 절망에서 놀라운 희망을 얻은 간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이 희망의 손길을 가지고 여러분을 찾아오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도 아닙니다. 어떠한 윤리와 도덕의 규범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나를 절망적인 존재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시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에 절망적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꽤 살림도 있고 명망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중풍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늘 마음속에 고민을 하고 억압을 당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하루는 고혈압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는 그만 말도 못하게 되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침상에 드러누워 산송장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중풍은 어려운 병입니다. 하물며 2000년 전이야 중풍이면 그로서 끝난 것입니다. 모든 의원과 약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절망 중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이 사람의 마음은 희망으로 뛰기 시작했었습니다. 심장이 뛰었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동료 네 사람을 불렀었습니다. 제발 나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좀 데려다 달라.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나는 새사람이 된다. 나는 새로운 소망을 얻는다. 나는 살아난다. 종교를 얻으려고 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 가면 내 운명이 변화될 수 있다. 친구들은 이 사람의 간청을 듣고 들것에 실어서 네 사람이 들고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니까 벌써 사람이 장사진을 치고 인산인해로 그 대문밖에 얼씬할 틈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 환자는 말했습니다. 이 집주인을 만나게 해다오. 그리고 내가 이 집에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서 예수님께 달아 내리도록 해다오. 이 집의 지붕을 뚫으면은 아마 집주인이 집 값을 내라고 할 것이다. 후히 내가 집 값을 지불하겠다. 필요하다면 이 집을 사버리겠다. 또 필요하다면 이런 집을 지어주겠다. 나는 기어코 예수님을 만나야 되겠다. 나는 이제 후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집주인과 상의해서 허락을 받고 그들은 사다리를 타고서 지붕에 올라가서 맷돌로 지붕을 깨뜨렸습니다. 온 집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 먼지의 사태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지붕에 구멍을 뚫고 난 다음 이 사람을 줄에 달아서 예수님 앞에 내리니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이 이 사람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무리 나는 종교를 가졌소. 우리 아버지가 장로고 어머니가 권사요 나는 그런 집에 태어났소 그런 말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의 마음속에 감추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보이고 마귀 앞에 보이고 믿는 자와 믿지 않은 자에게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성수주일하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예배당에 앉아 계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나오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오늘 교회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고 마귀가 보고 불신자와 신자가 다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이는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나가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할 때 이것은 보이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혼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밖으로 나와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보이는 가장 큰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세상에 물질을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죽고 사는 것은 물질에 달렸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피땀을 흘려가며 애쓰며 사람들은 물질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도 말하기를 네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십일조를 드리고 헌물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의 극치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이 없고야 하나님께 십일조나 헌물을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신앙을 가지고 나오면 주님은 그 눈에 보이는 신앙을 따라서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했는데 그 믿음이란 바로 눈에 보이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중풍병 환자는 예수님이 보시기에도 눈에 보이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눈에 보이는 믿음이 없었으면 들것에 실려오고 또 집 한 채를 부서뜨리더라도 예수님 앞에 가까이 오겠다는 이와 같은 불 퇴진의 신앙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믿음을 보셨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이 사람의 믿음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시자 말자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는 담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을 수 없지만은 죄는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사람을 보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니까 거기에 앉아 있던 율법사나 서기관들이 속으로 불평을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생각을 아시고 곧장 말씀했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자 이 사람은 즉시로 고침을 받고 침상에서 일어나서 그를 걸머지고 나가매 그렇게 안 비켜주던 길이 환하게 트여서 그는 뛰고 울며 감사하며 찬미하며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들어올 때는 들것에 들려왔지만 그가 불 퇴진의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믿음을 갖자 죄 사함을 받고 병 고침을 받고 나아갈 때 그의 막힌 길이 환하게 트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참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간절히 찾으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병을 치료해 주시고 우리의 앞길을 환하게 열어주셔서 눈물이 기쁨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죽음이 삶으로 변화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중풍병 걸린 사람은 예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 일생에 가장 위대한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희망의 원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셨으니 그 얼마나 큰 희생인 것입니까?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는데 오늘 여러분과 나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십자가 밑이 그런 장소인 것입니다. 갈보리산 십자가 밑에 우리의 푸른 초장이 있고 그곳에 쉴만한 물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절망을 다 못 박아버리고 불태워버린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여러분과 나의 소망의 원천입니다. 그곳에서 절망이 사라져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오늘 인류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처소는 바로 십자가 밑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죄 사함을 받는 크나큰 소망을 얻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5년, 10년도 걸리고 온갖 고행을 다하고 온갖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서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거대한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눈 깜작할 사이에 그 순간에 그 모든 죄가 하나도 없이 다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십자가 밑에는 죄 사함의 놀라운 희망의 광채가 비치는 처소인 것입니다.

둘째로, 십자가 밑에서는 크나큰 위로를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마치 고아와 같이 버림을 받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는 외로운 인생 길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 밑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도와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에게로 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보혜사란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보내신 우리의 변호사요 우리의 위로 자요 선생이요 안내자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께서 매일같이 숨쉬면 공기가 뱃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 속에 와서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평소에 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과 함께 역사 하여 주셔서 여러분에게 위로의 원천이 되십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연약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적으로 연약하고 감정적으로 연약하고 의지로 연약하고 육체로 연약하고 생활에 연약할 때 보혜사 성령은 여러분과 나에게 돕는 자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수없이 성령께 부르짖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저는 전 세계 각지에 나가서 크고 낮은 자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됩니다. 조용기의 지력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나 내게 돕는 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에 크나큰 위로를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늘 말합니다. '보혜사 성령님,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들입니다. 의지합니다. 성령이여 나와 함께 가 주시옵소서' 저는 성령님과 함께 나갈 때 높고 낮은 자 어떠한 처지에 처할지라도 성령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모략과 재능을 주셔서 무슨 일이든지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을 늘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연약하나 십자가 밑에서 크나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보혜사 성령을 모시는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치료의 소망을 얻습니다. 오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부정적이 되면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힙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부정적이 되나요? 남을 의심하고 남을 미워하고 남을 정죄하면 자기도 부정적이 되고 그 다음 부정적이 된 사람은 이 세상에 어느 곳을 보나 남의 결점만 바라보고 남을 할퀴고 남을 올무에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정적으로 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긍정적으로 될까요? 긍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말과 긍정적인 행동을 어떻게 할까요? 이것은 인간적으로 힘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으로 되려면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긍정적이 됩니다. 남편을 긍정적으로 보려면 남편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남편에게 감사하십시오. 아내를 긍정적으로 보려면 아내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사하십시오. 인간이라는 것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길 이외에는 절대로 긍정적이 안됩니다.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고싶으면 자기를 용서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자기도 긍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용서를 받고 사랑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긍정적으로 치료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인격적으로 치료함을 받는다는 것 중요합니다. 치료함을 받은 남편 치료함을 받은 아내 치료함을 받은 부모 치료함을 받은 자식들이 함께 살 때 여러 가지 역경이 다가오지만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밝고 맑고 환한 마음을 가진 그 속에 용서와 사랑과 감사가 있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이와 같이 치료를 받아 긍정적이 될 수 있고 육신의 치료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육신이 병들고 의학적으로 치료함을 받을 수 없는 절망에 처할 때 얼마나 어둡고 캄캄한 사망의 음침한 구렁텅이로 떨어지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의 의사가 되시고 예수께 나오면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치료해 주시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희망찰 수가 있습니다.

넷째로,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이 세상에서 가시와 엉걸퀴에 휘말려서 피투성이가 된 인생이 다시 재생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과 내가 인간다운 삶,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된 삶, 남에게 짐이 되지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저주가 이 땅을 휩쓸어서 가난과 낭패와 실망과 절망의 가시와 엉걸퀴에 걸려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 와서 이 가시와 엉걸퀴를 풀어 젖혀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다 속량해 주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저주에서 값 주고 사냄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의 축복 속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나는 못 한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절망이다'는 부정적인 저주의 가시채와 엉걸퀴를 뽑아내어서 여러분의 생각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예수님이 나의 축복이고 아브라함의 축복이 내 것이라'는 줄기찬 믿음을 얻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께 복을 받아 남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저가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은 즉 그 의가 영원히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저주에서 해방을 얻어야 되는데 십자가 밑에는 저주에서 해방을 얻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강물처럼 넘쳐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우리는 축복의 희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섯째로, 십자가 밑에서 영생부활의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어제까지 즐겁게 노래하고 대화하던 사람이 오늘 사라질 수 있습니다. 나는 어제 훌륭한 한 어른이 순식간에 세상을 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식사 잘 하고 대학 다니는 애들에게 조심해 다녀오라고 당부하고 부인에게 내가 직장에 갔다 오리다 인사하고 집 앞에 나와서 통근차를 타려고 길을 건너는데 18살 먹은 무면허 오토바이 운전사가 전 속력으로 달려와서 50대의 그 어른을 치어서 죽였습니다. 여러분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거짓말같이 살다가 거짓말같이 없어집니다.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풀의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나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소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 죽음조차도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사도바울이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말하기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안다고 그는 확실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세계를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이 예비한 하나님의 손길을 알면 죽음이 다가와도 우리는 겁내지 않습니다. 그 건너편에 그 영광 속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희망찰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며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직 용서와 사랑과 희망이 있는 곳에 우리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희망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희망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예수께 나와서 절망을 불사르고 여러분의 모든 삶에 넘치는 희망을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은 절망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힘으로 희망을 찾으려고 해도 절망은 희망을 다 감싸 삼켜버리고 맙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그러나 절망이 불태워진 곳이 있습니다. 절망이 죽어버린 곳이 있습니다. 절망이 파멸된 곳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갈보리 십자가 밑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갈보리 예수님께 나와서 절망의 짐을 벗어놓게 도와주시옵소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