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나는 누구인가

by 삶의언어 posted Oct 22, 2024 Views 64 Replies 0
?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ESCClose

Larger Font Smaller Font Viewer Up Down Go comment Print
Extra Form
오늘의 주제 그리스도인
예배드린 날 2006-09-03
오늘의 성구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h6vcy0Gp4gk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아담의 타락 이후 진정한 자기를 잃은 인류
죄책과 허무와 절망가운데 방황하지만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주님으로 소망 얻어


 동물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절대로 묻지 않습니다. 동물은 본능적인 삶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다릅니다.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화전을 가꾸며 사는 농부라 할지라도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이와 같은 질문은 자기를 찾는 질문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마음에 공허를 느끼는 것입니다.

 

 1. 나는 누구인가?

 모든 종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이와 같은 질문은 자기의 내면을 향한 것으로 영혼을 찾기 위한 질문인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다음 세가지의 함축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로 죄책의 절망을 아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죄에 둘러쌓여 있는 죄 덩어리이고 죄의 정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발견한 ‘나’라는 존재로서 죄책과 정죄의 절망에 처한 사람입니다. 두번째로 허무와 무의미를 아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고 우연히 태어나서 허망하게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허무와 무의미로 가득찬 존재가 자기라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내린 두번째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이란 죽음과 무의 절망을 품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번나서 죽고 죽고나면 안개처럼 사라지게 되어 절대적인 무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병은 암 같은 질병이 아니라 자아상실 즉, 자기를 잃어버린 절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의 삶에는 죽음, 고뇌, 투쟁, 죄책 등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이 있다. 이러한 현실의 한계상황으로 인한 좌절을 인정하는 데에 인간의 실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존주의 문학가 알베르 까뮈 역시 “인생은 부조리한 것으로, 인생의 무의미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찾은 ‘나’라는 존재는 죄의 절망과 허무와 무의미,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이 인생이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전도서 1장 2절로 3절에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말씀하고 있고  전도서 2장 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전도자가 발견한 ‘나’라는 존재도 모두 헛된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극작가요, 문학 비평가였던 버나드 쇼는 인생의 절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는 두 가지 절망이 있다. 하나는 일들이 마음대로 안 되는 절망이요, 둘째는 마음대로 되고 난 이후에 다가오는 절망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일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그 결과는 항상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오직 구속해 주시는 이가 와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아담에게 성경은 절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벌거벗은 수치로 가득찬 버림받은 자아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므로 죄책의 부끄러움 앞에서 도망쳐 나무 뒤에 숨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발견한 자아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저주받은 땅에서 고생하며 살수 밖에 없고 종국적으로 ‘나’라는 존재는 병들고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비극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이 절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 절망의 바다에 빠진 인생을 누가 건져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주기 전에는 우리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에 의하면, 인생의 중반을 넘긴 환자들 대부분이 인생의 최후 수단으로 종교적 인생관을 발견하는 문제로 씨름한다. 또한 종교적인 인생관을 얻지 못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치유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이유를 발견할 때까지 의미 없이 방황하며, 그로 인해 인생이 상실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발견하기 전에는 절망적인 존재로 인생의 의미를 결코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루하루 분주한 인생을 살아도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절망인 것입니다.

 

 2. 예수님과 만나야 한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과 하나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은 절망적인 인간을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면 바닷물속에 같이 뛰어 들어가야 건져낼 수 있는 것이지 가만히 육지에 서 있기만 한다면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의 바다에 빠진 인생들을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절망 가운데 처한 인생의 바닷물 속에 뛰어들어 우리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로 15절에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을 당신의 것으로 짊어지고 인간의 채무를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인생의 죄짐을 짊어지고 마귀의 굴레속에 몸을 내어 맡기신 것은 병들고 저주받고 고난당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건지려고 한다면 그는 절망을 이길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많은 종교가와 철학자들과 현인들이 인간을 절망에서 건질 수 있다고 말했지만 모두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절망의 바다에 빠진 인생을 건지기 위함이고 또 건질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만이 죄와 더러움, 질병과 저주, 죽음을 십자가 위에서 청산하시고 부활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하나님의 나라로 옮길 수 있는 전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므로 확실하게 다 이루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의 바다에서 부활하시므로 우리를 절망에서 건지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5절로 57절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 8장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절망속에 들어와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와 불의와 추악과 저주와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청산하신 후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요 영원한 승리자가 되셔서 우리에게 끝없는 소망의 원천이 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에서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선물을 이미 받았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삶의 모든 부정과 불의에서 씻음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마귀의 종 되었던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해방되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성령을 주셔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속의 더러움을 이기고 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로 6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심신을 치료받고 건강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병, 육체의 병을 치료하시고 건강과 생명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질병의 고통과 절망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되고 천국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절대 절망이 예수님으로 인해 절대 희망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의심하는 가운데 질문합니다. 예수를 믿어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 치료받고, 예수를 믿어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고 예수를 믿어 부활, 영생, 천국을 얻는다고 하는 말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꿈같은 소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예전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늘날 현실화 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동차가 없던 1840년 대에는 ‘시속 30마일, 즉 48km로 여행하면 누구나 질식하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동차로 시속 200km로 달려도 질식해서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여겼던 1900년 대 초에 ‘인간이 하늘을 날아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 기술은 보잉 747기와 같은 비행기를 만들어 수백명의 사람들이 태평양, 대서양을 비행하여 이동하므로 온 지구를 일일생활권으로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또한 예전에는 인간이 우주 밖으로 나가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달에 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현대의 과학은 인간의 달 착륙과 화성탐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전에 불가능했던 것이 지금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불가능했던 모든 것이 현실화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심지어 우리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던 조지 뮬러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예전에 생각했던 것이 전부 가능하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절망의 바다에 빠진 우리가 소망으로 건짐을 받는다는 것은 절대 가능한 일이고 확실한 것입니다. 성경은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적인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삶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길, 진리,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길을 잃어 버리고 방황한다는 것은 끝없는 절망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방황하다가 죽게 된다면 결국에는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용서받고 의로움을 받는 길이요, 거룩하고 성령받는 길이요, 치료와 건강의 길이요, 부활과 영생의 길이요, 축복과 형통의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길이 우리에게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길을 가슴에 품고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절대적인 진리가 되십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영원한 진리요, 확실한 사실이요,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진리를 얻었기 때문에 마음에 참 기쁨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거짓이 아닌 진리 속에 거하므로 마음에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 마음은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은 마귀에게 미혹되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식욕, 성욕, 명예욕, 물욕, 권력욕 등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탐욕에 끌려가게 되면 가시밭을 지나게 되고 마지막은 지옥의 길로 떨어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로 11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길과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참된 삶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증명되지 않은 가르침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미혹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세상은 거짓된 가르침이 제시한 길이 참된 길이라고 말하지만 어느 것도 참된 길임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영생 천국의 길로 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해야 확실한 증인이 되고 우리에게 참된 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지 못하는 이 세상의 가르침은 모두 거짓된 가르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직접 죽었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스위스의 라브리에서 세계의 지성인들이 모인 가운데 이 시대의 방향과 믿음의 갈 길을 제시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났던 가장 커다란 비극은 사람들이 절대 가치를 버린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절망의 선 밑으로 떨어졌다” 절대가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절대 가치인데 하나님도 계시지 않고 예수님도 계시지 않다. 절대 진리는 없다. 진리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이러므로 사람들은 완전한 길에서 벗어나 진리를 잃어 버리고 방황하게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19세기 이전의 사람들은 절대로 옳은 것과 절대로 그른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와 사람들이 ‘절대 가치’를 의심하면서 더욱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옳은 길도 진리도 없다고 말하므로 모든 사람은 방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절대 진리를 버리고 절망적인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절대 절망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야 절대 희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절망이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빛과 영광만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절대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절대 희망의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우리에게 절대 진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성령을 받아 현재와 내일을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로 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종교와 철학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만나는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켜 줄 뿐 아니라 육체적인 죽음에서까지 건져주시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가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 진정한 만족을 느낄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야만 인간의 절대 절망이 예수님의 절대 희망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의 질그릇인 우리안에 예수님을 모심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고 소망 넘치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부르짖음과 울부짖음 속에 우리는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발견하고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사람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자기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항상 자기를 찾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이 모든 종교를 만들어 내었지만 참된 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안에서 우리가 길과 진리를 찾고 부활의 생명을 얻은 자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