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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by 삶의언어 posted Sep 29, 2024 Views 2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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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1절


사방으로 우겨싸여 고통 당하는 우리 인생
환난과 시험 속에도 하나님 섭리 깨달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승리의 삶 살수 있어


 우리가 심한 고생을 당하면 뭐라고 말합니까? “죽도록 고생했다” “죽을 고생을 했다” 이렇게 말합니다. 고생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사는가” 하고 물으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을 지경이다”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고 했습니다. 왜 죽음에 넘겨지느냐. ‘예수의 생명도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오면 생명도 뒤따라 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죽음의 반대급부는 생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1. 왜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져야 하나?

 “왜 하필이면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져야 하느냐. 그냥 죽으면 죽었지 왜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겨져야 하느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릴 때 예수님의 생명의 광채가 나타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두워야 빛이 효과가 있지 어둠이 없는 곳에는 빛이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태양이 작열하는데 전등불이 무슨 효과가 있는 것입니까? 어두움이 깔려야 전등불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죽음이 있는 곳에야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17살에 폐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었습니다. 당시 병원에 진찰하러 가니 조중삼 박사님이 엑스레이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폐 오른쪽 중엽이 다 썩어서 구멍이 뚫어졌고 왼쪽은 폐병이 꽉 들어찼으니 이런 병은 수술도 할 수 없고 약물치료도 없으니 그저 잘 먹고 잘 입다가 가는 것이 좋다”라고 완전히 절망적인 말을 했습니다. 내가 영어를 모르는 줄 알고 의사들끼리 영어로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못 알아듣고 “그저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라고만 말했습니다. 저는 아버지 손을 잡고 “아버지 갑시다. 필요 없습니다. 끝장 났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냉방에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고 천장의 파리똥만 헤아리고 별도리 없는 다른 종교의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으나 날로날로 죽음이 내게 다가왔습니다. 죽음이 바로 오면 쉽지만 드러누워도 숨을 쉴 수 없고 앉아도 숨을 쉴 수 없는 그 고달픔은 밤새도록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고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괴로움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짙은 그림자가 비취니 비로소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은 살려 준다고 하니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고 진짜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서 오늘 50년 동안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우면 예수의 생명도 또한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생명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도 다가오는 것입니다. 절망에 처해야 소망을 찾게 되고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의 간증을 읽어 보았었습니다. 그는 갑상선암에 걸렸었습니다. 갑상선암은 별로 위험한 암이 아니기 때문에 병원에 가서 쉽게 수술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암이 전이 되어서 간암이 되었습니다. 간암도 초기여서 그것도 수술해서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후두암이 생겼습니다. 의사는 “전에 갑상선암을 수술한 것과 곁에 있으므로 이것은 수술이 불가능합니다. 의학적으로는 못 고칩니다. 당신은 후두암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야 그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누가 나를 살려 주겠는가. 하나님밖에 없겠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갑상선암도 심한 것이 아니었고 간암도 수술하고 고쳐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가 후두암에 걸리자 제일 먼저 하나님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는 만사를 다 제쳐 놓고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올라가 회개하고 금식하며 “주님, 살려 주십시오. 나는 예수도 안 믿고 주일도 안 지키고 십일조도 드리지 아니하고 내 멋대로 산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 나와서 등록하고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오고 말씀 읽고 기도를 하고 부르짖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찾자 점점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지고 마음이 평안해지고 기뻐져서 그 다음 다시 재차 검진하러 가서 검사해 보니 깨끗이 나아버렸습니다.

 성경에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 해방시켜 주는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평범할 때는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서 갈 길이 없을 때 우리를 해방시키는 예수님이 필요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봐야 답답할 때 우리를 이끌어 주는 예수님이 필요해서 비로소 새벽기도도 나오고 철야도 나오고 부르짖어 기도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게 되고 남에게 핍박을 당해 버림을 당해봐야 그때는 나를 위로해 주시는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고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서 완전히 망해봐야 다시 잿더미 위에서 일으켜 세우는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2. 환난이 주는 축복

 우리가 환난을 당하면 뒤에 축복이 온다는 것을 알고 환난을 보고 놀래서 뒤로 넘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환난은 잠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받은 환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후한 것을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말씀합니다.

 프랑스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 중에 하나가 ‘포도주’입니다. 프랑스에서 포도나무를 어디에 심는가 보면, 산비탈 험한 박토에다 심습니다. “기름지고 좋은 땅에 포도나무를 심으면 좋겠는데 왜 기름지고 좋은 땅에 심지 않고 산비탈에 박토에다가 포도나무를 심느냐”고 신기해서 그것을 수차례 물었습니다. “불란서 사람은 아이큐가 모자라냐. 왜 나무도 잘 자라지 못하는 저 산비탈 박토에 포도를 심느냐”고 물으니 그 이유가 좋은 땅에 포도나무를 심으면 포도나무 뿌리가 깊이 들어가지 않고 얕은데서 습기를 빨아들이고 모든 양분을 빨아 들이는데 얕은데는 중금속이 많고 오염된 흙이 많아 그 곳에서 중금속과 오염된 흙의 양분을 빨아 들이므로 포도가 나중에 열매를 내더라도 질 높은 포도주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험한 산 박토에다가 심어 놓으면 포도나무가 살아나려고 뿌리를 땅 밑에 깊이 내려 물기를 빨아들이고 양분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중금속이 없고 오염된 요소가 없기 때문에 아주 좋은 포도열매를 맺어서 질이 좋고 깨끗한 맛있는 포도주를 양산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고통속에 있으면 뿌리가 깊어져서 더 좋은 포도를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소나무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대목수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좋은 집을 짓는데 얕은 산에서 무성하게 자란 소나무를 쓰지 않습니다. 소나무는 약하고 잘 부서지기 때문에 그것을 쓰지 않고 높은 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란 소나무는 나무의 질이 좋아서 좋은 집을 짓는데 재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훌륭한 재목이 되고 하나님이 사용할 사람이 되려면 박토에 자라게 하고 고통을 당하게 해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심지가 굳고 연단된 사람으로 만들어서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환난이 절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가져오기 위해서 환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은 우리의 삶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사망의 체험을 하고 환난과 고통의 체험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고 마는 것입니다.

 수영을 잘하는 미국의 소녀 조니는 17살 때 다이빙을 하다가 그만 물밑 바위에 머리가 부딪혀 목 밑의 뼈가 부러져서 전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목이 부러져 하루 아침에 전신마비가 되는 장애가 되었으니 그는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가족들과 친구들이 위로해 주고, 또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로 훈련을 받아서 그 취미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서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은 나를 완전히 절망에서 끌어내어 주었습니다. 이 휠체어 인생으로부터 무엇보다도 더 먼저 감사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마비로 인한 내 모든 시련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제게 임하신 것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고통 뒤에 이유를 두셨고 그것을 알고 나니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들의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조니는 비록 하반신마비가 되어 휠체어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입으로 그림 그리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강연자로 활동했습니다. 또 자기를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불구의 몸에도 결혼을 하고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조니는 “나는 만일 내가 불구자가 되지 않았으면 예수를 믿고 하늘나라를 알지 못했을 것인데 내가 이 불구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하늘나라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행이 반드시 불행이 아닙니다. 불행과 고난은 그 뒤에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인생에 새로운 목표를 주기 위해서 다가온 시험과 환난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환난과 시험을 당하면 그 뒤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손길을 찾게 되고 인생의 목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의미 없이 그냥 우리를 죽이려고 다가오는 시험과 환난은 없는 것입니다.

 

 3. 반드시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에게 여러가지 시험이 다가올 때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내게 하나님이 짐을 지울 때는 짐을 질 만한 힘이 있게 만들고 난 다음에 짐을 지우게 하시지 짐에 깔려 죽게 만들려고 짐을 지우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해 고통과 괴로움에 처할 때 ‘이제 나는 살 수가 없다. 고통을 당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당할 쯤에 하나님이 반드시 피할 길을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피할 길 없이 시험을 당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 피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시험만 바라보지 말고 시험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는 성인이 되면 성인식으로 반드시 밤에 산속나무에 묶여서 밤을 세워야 합니다. 사나운 짐승들이 많은데 아버지가 데리고 가서 그를 나무에다가 묶어 놓습니다. 밤새도록 사나운 사자와 호랑이나 여우들이 다가와 그를 죽일 것인데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통과해야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밤에 사나운 짐승이 아들 곁에만 오면 쓰러져 죽고, 쓰러져 죽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아들을 나무에 묶어 놓은 아버지가 그 근처 나무 위에 올라가서 활로 짐승이 아들 가까이 오면 쏘아 버린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 감춰진 아버지가 아들을 보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의 밧줄에 묶였을지라도 하나님은 숨어 계셔서 언제나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시고 감당치 못할 시험이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하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그 날에는 내가 너 안에 너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만 보지 마십시오. 파도만 바라보면 놀라서 빠질 수 있습니다. 시험의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시험은 동등 이상 축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험과 환난과 고난은 항상 동등 그 이상의 축복을 가져오기 위해서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이지 무의미하게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가에서 무서운 시험을 당했습니다. 300만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서 모세를 따라 홍해에 왔는데 앞에는 창일한 바다요, 뒤에는 애굽의 바로가 군대를 동원해서 다시 그들을 잡으러 진격해 왔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을 향해서 부르짖어 고함치고 모세를 향하여 “애굽의 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곳에 와서 다 죽게 하느냐”고 탄식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오늘날 가만히 있어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는 구원을 보라 오늘 너희가 본 애굽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그리고 모세가 손을 내밀자 홍해가 갈라져 그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백성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이런 무대를 만든 것입니다. 이 무대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능히 이끌고 홍해 윗쪽에 갈대밭을 지나서 광야를 들어갈 수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홍해 중간에 데리고 와서 이런 시련을 겪게 하셨을까요. 환난과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며 하나님이 어떤 영광과 권세가 있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역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니다. 무대 없이 배우가 와서 연출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무대가 없이 나타나실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가지 시험과 고난이 다가오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나타나기 위한 무대를 만들기 위함 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무대를 우리가 완성하면 하나님이 그 무대에 나타나셔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시험에 넘겨지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기 위한 기회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불시험은 기쁨과 즐거움을 갖다 주기 위한 무대에 불과한 것입니다. 많은 시련을 겪어봐야 시련에서 해방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늘 좋은 환경만 있으면 기뻐하고 즐거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10절은 우리에게 굉장한 귀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얼마나 핍박을 당했던지 도저히 살아갈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지혜로써 살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막다른 골목은 하나님의 열린 기회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력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완전히 포기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을 택해서 환난과 고난과 죽음을 통하게 하시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나님이 찾아올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은 믿지 않는 사람처럼 불안과 초조와 절망 속에 고함치고 뒤로 물러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무대를 만드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 놀라운 간증을 하게 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환난 앞에 고함 치고 울고 도망치지 말고 환난을 감사하고 찬송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