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by 삶의언어 posted Oct 01, 2024 Views 2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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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장 33∼34절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어
교회는 유일하고 참된 희망인 예수님 전하는 곳
항상 희망을 꿈꾸고 믿고 고백하면 삶 변화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 매달려 6시간 동안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매달려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저녁에 해가 뉘엿뉘엿 져갈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대신 짊어진 죄가 너무나 크고 심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그 부르짖음에도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또한 3년 반 동안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고 동행했던 제자들도 모두 도망쳤습니다. 이제 예수님 곁에는 남아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십자가 밑에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고 손가락질하던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은망덕하게도 순식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부딪치자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향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탄식을 하신 것입니다.

 

 1. 희망을 잃어버린 무의미한 삶

 희망을 잃어버린 자에게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목적도 방향도 없이 허랑방탕하게 살아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절망을 한 몸에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청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세상은 온통 절망의 구렁텅이입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도 절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희망의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어둠의 절망에서 삶은 아무 가치가 없게 됩니다. 사람은 희망이 있을 때 살려고 발버둥치지 희망이 없으면 살 가치도 없고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3년 동안 수감되었던 독일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은 자신의 책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다음과 같은 자기 체험을 기록했습니다. 1944년 겨울 그가 갇혀있던 수용소에서 성탄절에서부터 연말까지 갑자기 일주일 동안 사망자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갔습니다. 병들어서 죽는 것도 아니고 가스실에 끌려가서 가스를 마시고 죽은 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무리 흉악한 히틀러라도 죄 없는 자기들을 놓아줄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풀어주지 않자 그들은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줄지어 죽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희망을 잃어버리면 죽음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희망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리면 절망 속에서 결국 죽음이라는 최악의 피난처를 택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른바 ‘생계형 자살’이 늘고 있습니다. 지난 2월에도 세 모녀가 동반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버지가 암에 걸려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워지고 그로 인해 두 딸은 신용불량자가 되었으며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마저 팔을 다쳐 더 이상 생계를 지속하기 어렵게 되자 마지막으로 밀린 집세 일부를 봉투에 넣어두고 유서만 남긴 채 두 딸과 어머니가 자살을 하는 비참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연합뉴스, 2014. 2. 28). 그들은 누구에게도 도움을 얻지 못해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지자 결국 죽음이라는 최악의 피난처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한 사람들의 유서에서 흔히 발견되는 말은 “희망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조차 잃어버리면 결국 막다른 골목에서 죽음을 택하게 됩니다.

 반드시 직장도 없고 병들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만 절망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도 그러한 위기가 찾아옵니다. 스스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이 큰 성공을 한 사람들도 절망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성공을 하여 높은 곳에 올라보니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통계적으로 성공하고 난 다음에 자살하는 사람이 패배하고 자살한 사람과 거의 동등한 숫자라는 결과도 있습니다.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프랑스의 발레리나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춤을 추면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놓고 바라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무대에서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수많은 사람의 기립박수를 받고 공연을 다하고 난 다음 호텔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자기 몸을 던져놓고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사는 게 뭘까? 이렇게 춤을 추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아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면서 말입니다.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E. Hemingway)도 그렇게 기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음에도 사냥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나는 전기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 빈 전구같이 인생이 너무 허무해서 살 수가 없다”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으면 아무리 성공을 해도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도 절망으로 자살하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도 절망으로 자살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숨길 수 없고 양심의 가책이 극에 달해도 자살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도 자살하고 죽음의 공포가 몰아칠 때도 자살합니다.

 

 2. 희망의 횃불을 비추던 엘리야의 절망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횃불을 비추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자살의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가 대적했던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서 이기고 난 후에 극도의 영광 속에 있어야 될 사람이 그곳에서 도망하여 자리에 주저앉아 자살의 충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과로해서 고독함을 느낀 엘리야는 아합 왕의 아내였던 이세벨의 협박에 좌절했습니다. 이세벨은 이방인 나라의 공주였습니다. 그녀가 아합 왕에게 시집올 때 이방신들과 이방의 선지자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 때문에 이스라엘이 전부 이방신을 섬기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위기의 시대에 엘리야 한 사람이 야훼의 선지자로서 그들과 대결해 싸워 이긴 것입니다.

 이에 화가 난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2절로 4절은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야훼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라고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엘리야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요, 그가 기도하면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덮이고 비가 내리던 그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그를 통해 역사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가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자들과 함께 어느 신이 참신인지 갈멜산에서 경쟁하여 그가 기도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잡아서 기손 시냇가에 내려가 모두 목을 쳐서 죽였습니다. 정말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엘리야가 이세벨의 공갈 협박을 전달받고 이렇게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위대한 사람도 공격을 당하면 낙심하는데 우리가 시련을 겪어 낙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엘리야는 엄청난 피로감과 과로로 고독했습니다. 그렇게 큰 성과를 거두고 난 다음에도 그는 혼자였습니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훌륭하고 위대하니 사람들이 그와 대화를 하려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고독함을 감당하지 못해 브엘세바로 도망을 쳐서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지쳐 잠을 자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물과 떡을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고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소망을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이처럼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사랑과 행복을 나눠줘야 됩니다. 절망한 사람에게는 그 조그마한 소망과 사랑 그것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위로의 말과 따뜻한 손길 하나가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희망에는 힘이 있습니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캘리포니아 어빈 대학의 루이스 고트샤크(Louis Gottschalk) 교수의 연구팀이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희망을 품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암 환자들은 병세도 쉽게 호전돼 낫기도 하고 생명도 오래 지속되었는데 희망을 품지 못하고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고 우울한 마음을 갖고 있는 환자들은 정신적으로 낙심해서 쉽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버드의과대학 스리니바산 필레이(Srinivasan S. Pillay) 교수는 ‘도대체 희망이 무엇이길래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고 연구했습니다. 그 해답은 바로 뇌에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움, 행복을 방해하는 뇌의 나쁜 습관』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희망을 품으면 뇌는 희망에 맞는 길을 준비한다. 우리의 뇌는 어떤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면 희망이 없을 때와 달리 전혀 다른 길로 방향을 잡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내게 희망이 있다’고 마음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 이것이 머리를 자극합니다. 그러면 온 몸의 기관들이 절망과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과 생명을 유지하는 기관이 되도록 우리의 뇌가 스스로 제어하여 다스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긍정적이고 희망찬 생각으로 뇌를 가득 채우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뇌가 희망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 인체의 모든 기관들을 이끌어 갑니다.

 

 3. 예수님의 복음과 자유와 해방의 희망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담과 하와 이후로 절망에 처한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한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로 19절은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어받은 죄의 값으로 땅은 저주가 임해 가시와 엉컹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내야 먹고 사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희망과 해방 그리고 축복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은혜는 완전한 자유와 해방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허물에서 놓여남을 질병에서 치료를 저주에서 축복을 죽음에서 천당을 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새사람입니다. 스스로 변화된 자기 이미지 즉, 자화상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항상 뚜렷이 바라보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은 대적해 물리쳐야 됩니다.

 우리는 마귀를 내어 쫓을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억압을 당할 때 그대로 참아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내어 쫓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리가 사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기록하였으며, 요한일서 3장 8절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에게 염려, 근심, 초조, 절망으로 스트레스를 주고 병들게 합니다. 그러나 마귀에 눌린 모든 자들은 주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아무리 와도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면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을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므로 우리는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시대에 살지 않고 은혜의 시대에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외에는 구원받을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우리에게 더 큰 희망을 주실 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그릇의 보배인 예수님을 모시고 있어야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려진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 성공했다고 마음에 희망이 넘쳐날까요?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해도 희망이 없고 실패해도 당연히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깊이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선물로 주신 것이므로 믿음을 통해 선물로 구원을 받고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희망이 있어야 삶의 모든 일이 이뤄집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 King) 목사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희망입니다. 수확할 희망이 없다면 농부가 씨를 뿌리지 아니할 것이요, 이익을 거둘 희망이 없다면 상인은 장사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몸은 심장이 중지하면 죽습니다. 그처럼 영혼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희망이 중지하면 죽습니다.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시고 참 희망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어찌하든지 절망을 심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에게 어찌하든지 희망을 심어주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부족하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더라도 우리 주님은 희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희망의 말씀이요 씨앗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희망을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좌절과 절망에 처한 사람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초청하여 희망을 주어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곳입니다.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Helen A. Keller)에게 기자들이 “당신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멀쩡히 두 눈을 뜨고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께서 내게 육신의 눈은 주지 않으셨지만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더 많은 것들을 보게 해주시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찬송시 작가 화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도 육신의 눈으로는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기쁜 삶을 살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를 8000편이나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 진정한 희망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눈을 뜨고 있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왜 사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천당에 가지 못가고 지옥으로 스스로 찾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구원과 복음에 대한 깨달음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진정으로 눈을 뜬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실망하고 절망하고 좌절한 인간으로 저주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까지도 희생하셔서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속에서 희망을 얻어야 됩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들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육신이 강건한 전인구원의 복을 날마다 바라보고 믿고 꿈꾸고 고백하여 온전히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얻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얻어 우리의 마음에 꿈을 품으면 꿈이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우리가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면 꿈을 꾸게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꿈을 마음에 받아들여 꿈꾸고 살면 꿈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꿈이 우리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희망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희망을 모두 잃어버린 아담의 후손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전히 회복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저주도 없습니다. 가난도 없습니다. 절망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희망의 십자가를 붙들고 소망을 생각하고 꿈꾸고 바라보고 믿으며 입술로 고백하며 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