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누구든지 인생살이에서 크고 작은 고난 체험해
인본주의적 태도버리고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과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살면 더 좋은 유익 얻어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고난을 체험하며 삽니다. 지금 현재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 배후에는 고난이 있고, 고난밖에 없는 줄 생각하면 그 뒤에는 좋은 일도 있습니다. 항상 밤낮이 바뀌는 것처럼 좋은 일과 고난은 서로 바뀌면서 수레바퀴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문제지 고난이 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다 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될까요? 우리 중에는 고난이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은 걸려서 넘어져 허우적대는 사람에게는 걸림돌이지만 그것을 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디딤돌이 됩니다. 다시 말해 똑같은 고난일지라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걸림돌이 되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디딤돌이 돼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고난을 겪지 않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미 살아오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다 겪어보았습니다. 고난으로 인해 삶이 파멸되기도 하지만 고난을 잘 이겨내 고난보다 더 큰 복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3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1. 고난에 대한 인본주의적 태도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가지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동등해지려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와 같은 태도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와 같은 사람은 자기들 스스로 주인이 돼 사는 사람입니다. 어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자신들에게 닥친 고난과 대결하면 혹시 이긴다고 해도 상처투성이가 되고 지면 십중팔구 패가망신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무모하게 자신들의 힘으로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무신론자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으로 모든 고난을 해결하려고 하다가 패가망신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고난을 자기가 아닌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항상 원망, 불평, 분노, 정죄를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절대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된 사람은 항상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이 특성입니다.
마치 아담처럼 말입니다. 아담은 “아담아 너는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셨을 때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하와가 먹으라고 하니 내가 따먹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담은 스스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와가 나를 꾀어 먹게 만들었으니 하와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와는 왜 선악과를 따먹었는지 물으시는 하나님의 책망에 “뱀이 나를 꾀어내어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담과 하와 모두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깨어진 사람은 자기를 뒤돌아보고 스스로 책임을 느끼고 회개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책임과 원망을 다 돌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 그 고난이 바로 우리 자신 때문에 다가오지 않았는지 깊이 살펴보아야 됩니다. 잠언 16장 18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자기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나빠서 그렇다고 교만을 부리면 결국 그 교만으로 말미암아 자기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고난에 대처하는 낮은 신앙의 단계
고난에 대처하는 낮은 단계의 신앙은 하나님을 통해 고난을 해결하려고 하면서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없는 신앙입니다. 그저 입술로만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는 ‘일은 내가 해결하겠습니다’하는 신앙입니다.
D. L. 무디 목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키가 굉장히 크고 몸이 거대한 목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딸을 데리고 얼음을 지치러 가면서 이 목사님은 혹시 딸이 미끄러질까봐 딸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면 그 딸은 자꾸 손을 틀어 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걸을 수 있는데 아빠가 왜 자꾸 손을 잡아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걱정이 된 아빠가 “아빠가 붙잡아 주면 좋지 않으냐”고 말해도 “필요없다”고 손사래를 치고 혼자 걸어갑니다. 그렇게 혼자 잘난 듯 얼음 위를 걸어가다가 결국 미끄러져서 ‘꽝’ 엉덩방아를 찧으면 그 다음에는 엉엉 웁니다. 그래서 아빠가 손을 내밀면 겨우 손가락 하나로 잡습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가 뭐 얼마나 힘이 있나요? 잡자마자 결국 또 미끄러져서 또 엉덩방아를 찧습니다. 그렇게 상처투성이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그 딸이 울면서 손을 내놓는데 그러면 아빠는 손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딸을 들어 올려 가슴으로 안고 얼음 위를 걸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아니고 자기 힘을 의지해서 나가는 사람도 기도는 합니다. “하나님 이 고난에서 나를 붙들어 주시고 지켜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그렇게 하면서도 온전히 맡기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지 않습니다. 그는 결국 전심으로 고난에 대항하여 자기 스스로 인간적인 힘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주체가 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니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처하는 낮은 신앙의 단계는 이처럼 여전히 자기 중심의 인본주의가 가득차서 하나님을 그저 자신의 보좌관으로 삼아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누구의 보좌관도 될 수 없는 분입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신앙적인 시련을 겪고 깨어졌습니다. 사막의 낡은 잡초 가시넝쿨 안에 불이 활활 붙었을 때 모세가 그 앞에 가니까 그 불길 가운데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신발을 벗어라”고 했습니다. 신발은 곧 인간적인 자존심과 자기중심의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은 “네 중심을 벗어서 하나님께 던지고 그를 온전히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신발을 신고서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상대해 주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주인의 아들은 신발을 신어도 종은 신발을 벗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의 주권을 넘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고 나니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생의 주인이 돼 모세를 이끌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견고한 여리고성 앞 평지에 여호수아가 섰을 때 한 군대장군이 칼을 뽑고 여호수아 앞에 섰습니다. 여호수아가 “당신은 원수의 편입니까? 우리 편입니까?”라고 묻자 그 장군이 말하기를 “나는 편들러 온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파견되어 나온 하나님의 군대장관이다. 네 발의 신을 벗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고 자기 주권을 내어 놓았을 때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모든 정치적이고도 군사적인 방법들을 말씀해 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든지 아니면 모두 다 스스로 책임을 지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를 원하십니다. 어중간하게 반쯤은 맡기고 반쯤은 맡기지 않는 엉거주춤한 그런 신앙 생활은 원치 않으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네 신발을 벗어라. 네 주체성과 네 중심의 생각을 벗어서 내게 맡겨라.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내게 맡겨라”라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면 지금부터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와서 도와만 주십시오”라고 고집을 부리면 “나는 너의 보좌관으로 오지 않았다. 네 마음대로 해라. 네가 충분히 깨어졌을 때 다시 오마”라고 말씀하시고 떠나실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신발을 벗고 온전히 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3.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신앙의 단계
이제 우리는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신앙의 단계를 배워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삼고 고난이 올 때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내어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힘든 단계의 신앙입니다. 물에 뛰어든 사람이 물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면 물이 그 사람을 띄워주는 것처럼 우리도 고난의 바다에서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쇠하든지 하나님께 모두 내어 맡겨버립시다. 그렇게 맡겨버리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이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엄청난 결단을 내려 죽을 각오를 해야 됩니다. 그런 각오를 하고 하나님 앞에 인생을 맡겨야 온전히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 우리 자신을 내놓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4장 19절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고 기록하며 시편 55편 22절은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는 맡은 것을 책임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일단 맡기면 하나님은 온전히 책임져주십니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온전히 책임져주십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단계의 신앙은 항상 고난이 다가오고 마귀가 그 앞에 서서 춤을 추고 야단법석을 치더라도 그 고난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고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조차도 우리에게 유익되게 하시지 손해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잔이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다가오면 눈앞에는 고난과 마귀만 보이지만 주님의 눈으로 한 단계 더 멀리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 결국 우리에게 유익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그 고난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반드시 가져오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이 크면 그 만큼 하나님의 큰 영광이 다가오고 고난이 작으면 그 만큼 작게 하나님의 은총이 다가옵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게 왔다가 지나가지 않습니다. 고난은 겉으로 볼 때는 굉장한 손해를 가져오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보다 멀고 높이 바라보면 굉장한 유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7절로 9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사람으로 셋째 하늘까지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혹시 그가 교만하여 질까봐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신의 질병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고난을 원망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34편 18절에서 19절은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야훼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기록합니다. 많은 고난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 고난에서 건지기도 하시고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면 징계를 내리시고 회개하도록 꾸짖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를 맞을 때 회개하게 됩니다. 고난이 없다는 것은 신앙이 성장하는 것을 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있으면 우리를 인격적으로 변화 받으라고 회개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고난을 통해 성장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됩니다.
시편 119편 71절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기록하며, 로마서 8장 18절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고난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오히려 고난이 유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고난은 반드시 그 배후에 영광을 줍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고난보다 견줄 수 없이 큰 영광이 됩니다.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비관론자는 매번 기회가 찾아와도 고난을 본다. 그러나 낙관론자는 매번 고난이 찾아와도 기회를 본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춤추고 즐거워하고, 고난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엎드려 그 고난이 결국에는 유익되게 될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보이는 세상 것은 잠시 있으면 다 지나가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5장 10절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고 굳건하게 만드시고 강하게 만드시고 견고하게 만드셔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니 좋습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사와 찬양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더 큰 상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도 고난을 피할 수는 없으나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면 고난은 크게 유익이 되고 훈련이 되지만 잘못된 태도를 가지면 심신의 깊은 상처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에 감사하여 그것을 약으로 변화시키든지 불평하여 그것을 독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고난은 좋은 약이 될 수도 있고 쓰디쓴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에 따라 고난은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디딤돌이 되기도 합니다.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셔서 그것을 통해 영혼이 더 잘되고 범사도 더 잘되고 육신도 더 강건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원망과 불평 그리고 탄식을 하면 상황은 더 나빠지고 더 고약해지고 더 큰 어려움이 거세게 다가오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내일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에게 더 좋고 유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고난의 과정을 겪게 하셔서 인격적으로 연단하시고 징계하시고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에게 고난을 통해 더 좋게 만들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부터 우리에게 고난은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한 유익입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간들의 삶은 그 누구도 고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그 고난을 복으로 바꿀 수도 있고 저주로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고난이 더 이상 우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든든히 세워주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하는 디딤돌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긍정적인 태도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오니 주님이 도우시고 힘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