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나는 과연 믿음의 사람인가

by 삶의언어 posted Aug 10, 2024 Views 4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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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장 17∼25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삶
믿음을 통해 주와 동행할 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회복해


 스페인 격언에 “돈을 잃어버린 자는 큰 것을 잃은 자다. 친구를 잃어버린 자는 더 큰 것을 잃은 자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버린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믿음이 삶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사람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 때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 일해서 그 대가로 떡을 사서 먹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나일강물을 대서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을 때는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살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의지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로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에 “그 때에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시험과 환난의 파도를 겪게 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강한 바람과 파도가 밀려올 때 그 앞에서 견뎌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말씀 위에 서 있으면 반석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반석에 서 있으면 시험과 환난이 우리를 감싸고 몰려와도 순식간에 그 파도는 산산조각이 나서 물보라만 날리고 반석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9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과 함께 혼인 잔칫집에 청함을 받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럴 때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께 와서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고하고 하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 5절에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물통에 물을 채운 후 이를 떠서 연회장에 갖다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대로 행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상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 한 백부장은 중풍에 걸려 죽어가는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말씀만으로 고쳐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마태복음 8장 8절에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만 주시면 그 말씀이 어떠한 병도 물리치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니 말씀만 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믿음에 감탄하신 예수님은 하인이 고침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13절에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떡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환경을 바라보고 살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면 말씀의 반석 위에 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꿈을 품고 사는 사람

 믿음의 사람이란 언제나 마음속에 꿈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의 고센땅에 살았습니다. 고센땅은 굉장히 기름진 땅입니다. 초목이 많고 물도 넉넉하고 목축도 할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름진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오게 하시기 위해 그들의 마음속에 우리가 앞으로 거하게 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레위기 20장 24절에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의 하나님 야훼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러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할 때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택해서 40주 40야동안 가나안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할 때 10명은 꿈을 잃어버린 보고를 하였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은 인간적인 생각과 인본주의에 서서 관찰한 것을 보고했습니다. 그들의 관찰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맞았습니다. “우리가 본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광막한 광야요 사막이다. 그리고 그곳에 성은 굉장히 높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로 우리는 그들에 비해 메뚜기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과는 상관없이 인간적인 관찰로써 본 그대로를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사물을 보았습니다. 민수기 14장 8절로 9절에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꿈을 가지고 보고를 했고 10명의 정탐꾼은 꿈이 없이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는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셔서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말씀을 통하여 꿈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알을 속에 품지 않는 닭은 알을 낳을수가 없습니다. 속에 알이 있기 때문에 알을 낳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꿈을 품어야 꿈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꿈이 없으면 현실속에서도 새로운 창조적인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36절로 38절에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야훼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꿈이 없으면 미래가 없으므로 그 자체가 재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꿈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주님이 주시는 꿈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오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원수들과 싸워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될 수 있는 꿈을 품을수가 있습니다. 더럽고 추악한 우리가 씻음받고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는 꿈을 품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병약하고 연약한 우리가 치료받고 건강하게 될 수 있는 꿈을 품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주받고 가난하고 낭패와 실망을 당한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형통하게 되는 꿈을 품을수가 있게 되고 죽어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꿈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십자가를 통해서 마음속에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꿈을 품지 아니하면 그 꿈은 결코 현실속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먼저 꿈으로 마음속에 잉태되고 난 다음에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우리는 마음속에 꿈으로 받아 들이고 그것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한 꿈과 환상을 주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게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젊은이의 마음속에 환상을 그리고 늙은이의 마음속에는 꿈을 그려 주시므로 이러한 환상이나 꿈을 품은 사람을 통해서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성령님이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꿈이라는 그릇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성령님은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꿈을 품으면 성령님은 꿈을 통해서 우리를 품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이 있으면 내일이 있고 꿈이 없으면 내일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모험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은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담대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말씀을 마음속에 품고 말씀의 줄에 우리를 묶어서 번지점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번지점프를 하려면 높은데 올라가서 줄을 달아 매고 뛰어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거의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 자유낙하를 하다가 바닥에 닿게 될 즈음에 줄이 우리를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 모험적인 사람은 벼랑에 서서 몸을 던지는 사람과 같습니다. 말씀의 밧줄이 자신을 묶고 있으므로 번지점프하는 것처럼 벼랑에서 몸을 던져도 나중에 땅에 부딪힐 정도가 되면 그 말씀의 줄이 자신을 붙잡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우리를 붙잡아 주지 않습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줄을 잡고 뛰어 내리는 자가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모험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모험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양떼를 칠 때 사자와 곰이 와서 새끼양을 물고가면 따라가서 사자와 곰을 죽여 양을 건져내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로 35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린 초립동이 사자나 곰에게 대항해서 싸울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자와 곰과 싸울 때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나가서 싸워서 이겼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이스라엘의 적군인 골리앗을 대항해서 싸울 때도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중에 사울 왕은 두려워서 뒤로 물러가고 이스라엘의 용사들도 떨며 뒤로 물러갔습니다. 이런 때에 이스라엘의 백전노장들을 뒤로 하고 초립동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해서 나간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벼랑에 몰려있는 상황에서도 다윗은 몸을 던져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이스라엘의 용사들은 하나님을 믿었어도 모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담대하게 모험을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골리앗에게 맞서 대항하였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36절에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밤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새벽녘에 돌아왔습니다. 배에 그물을 싣고 있는데 예수님이 배를 빌려 달라고 말씀하시므로 배를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난 다음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갈릴리 호수는 물이 맑기 때문에 밤에 물고기가 물 위로 올라오고 날이 밝으면 물고기들이 물 밑깊숙한곳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그물을 쳐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위에 찬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는 모험을 하였고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5절로 6절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베드로는 모험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모험을 하였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밤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큰 풍랑이 다가와서 노를 젓는데 심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괴로이 노젓는 것을 보시고 바다위로 걸어오셨을 때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고함을 치고 절망하는 중에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8절로 29절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하기도 하였지만 주님을 믿을 때는 모험적으로 믿는 제자였습니다. 모험적인 믿음을 갖고 그 믿음을 실천하므로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4. 언어가 다른 사람

 믿음이란 환경이나 감각이나 느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로 23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말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말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초환경, 초감각, 초느낌 즉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99살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갱신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 5절에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창세기 17장 15절로 16절에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가 되었고 사라는 90세가 되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자식을 낳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이름을 통해서 그들의 입술의 고백을 바꿔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사람은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말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셨으므로 우리의 병은 치료받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실패와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셨으므로 나는 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복이 따라오게 됩니다. 말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바꿀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힘과 능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우리의 언어가 바꿔져야 하는 것입니다. 감각적이고 지성적인 언어, 체험적인 언어는 인간적인 삶을 살수 있게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무리중에 한 사람이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마가복음 9장 22절에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믿음의 말을 하지 않은 그 아버지에게 아무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믿음의 고백을 하고 도움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로 2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두로 지경에 한 집에 들어가셨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녀에게 줄 떡을 취해서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시므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차별을 두셨습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말씀만으로 자녀의 병을 치료받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 27절로 3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신앙고백이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믿음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할 때 우리의 믿음대로 된다고 주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장 35절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405장) 등 좋은 찬송가를 많이 남겼던 영국의 존 뉴턴 목사님은 “세상에서 낙심하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으나 믿음의 사전에는 그런 말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낙심되는 것들이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길로 들어가는 신호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환경이나 감각이나 느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말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가능을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따라 생각하고 하나님을 따라 꿈꾸고 하나님을 따라 믿고 하나님을 따라 말하게 되면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사람은 말씀의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은 꿈꾸는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는 사람임을 알게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모험을 행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믿음의 요소를 갖추고 주와 함께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기적의 도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