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패배자는 설 곳이 없다

by 삶의언어 posted Aug 06, 2024 Views 2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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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브리서 3장 15절∼19절

 

 


동물의 세계에서 패배하면 살아남을 수 없어 인생도 마찬가지
패배는 마음에서 시작… 긍정적 생각, 자화상, 말을 통해 극복가능
성도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성공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독수리는 새끼가 날 수 있을 때가 되면 어미가 등에 업고 높이 올라가 공중에서 떨어뜨려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을 치고 날개 짓하는 새끼는 기르고 그렇지 않은 새끼는 죽게 내버려 둔다고 말합니다. 자연에는 강한 자가 되어야 살아남고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먹이가 될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 생존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보면 언제나 강한 민족은 약한 민족을 지배하고 수탈해왔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패배자가 설 곳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1. 삶의 패배자

 

 동물의 세계는 패배하면 죽습니다. TV에서 방영하는 아프리카 동물의 세계를 보면 굉장히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그것을 보면 사자나 표범, 가젤, 얼룩말, 누 등이 나오는데 언제나 사자와 표범이 가젤이나 얼룩말, 누를 잡아먹습니다. 어린 가젤이 살겠다고 뛰어가는데 사자나 표범이 따라가면 저는 혼자 앉아서 “가젤 빨리 뛰어 빨리 뛰어. 아이고 저 사자가 왜 가젤을 잡아먹으려고 그러나. 뛰어!” 그래도 결국에는 가젤이 사자에 잡혀 끌려가는 것을 보면 자연의 가혹함에 마음이 상합니다.
 인간의 세계도 한가지입니다. 패배자는 설 곳이 없습니다. 삶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 버림받거나 잊어버림을 당합니다. 마라톤 경기를 보면 선두그룹에서 뛰어가는 사람만 TV가 집중적으로 찍습니다. 우리들도 선두 그룹 속에서 뛰는 사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선두그룹에서 뛰다가 지쳐서 떨어져 나가면 우리의 관심사에서도 떨어져 나가 버리고 곧장 잊혀집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패배해서 뒤로 물러나면 잊혀지고 제외되어 버립니다. 그저 세상의 동정의 대상이 되고 불쌍히 여겨지는 대상이 되어서 곧장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뉴올리언스의 큰 수해를 보았습니다. 집을 잃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동정을 하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세상은 먹고 살기에 바쁘고 생존경쟁에 바쁘기 때문에 앞을 향해서 뛰어가고 그들은 다 뒤로 처져서 잊혀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패배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인생 경주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하고 선두그룹에 서서 함께 뛰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패배는 마음에서 시작

 

 오늘 우리가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생각해야 될 것은 패배가 어디서 시작하느냐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패배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운명적으로 패배할 수 없게 태어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삶의 패배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생활환경이나 운명 때문에 패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패배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끝 가데스 바네아에 와서 열두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었던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십주 사십야를 열두명이 정탐하고 와서 열명은 굉장히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치고 통곡을 하고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하나님과 모세를 대항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열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이시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회진시켜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오직 긍정적인 여호수아와 갈렙만 그 후손을 데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사람이나 열사람의 말을 듣고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패배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낭패와 실망을 당했습니까? 바로 그들의 마음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생각에서 이미 패배한 사람은 어느 곳에 가나 패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꿈을 잃어버리고 가나안땅을 사람이 살지 못할 땅이라 비난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립했던 열사람과 그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마음에서 패배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 곳에 가나 패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31절로 32절에 “그 땅 백성은 강하고 우리가 보는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황무지더라. 우리는 그곳에 가서 살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생각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했는데 그들은 거민을 삼키는 황무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은 ‘꿈’입니다. 꿈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꿈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꿈이 현실을 그렇게 변화시켜 가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을 현실과 착각하면 안 됩니다. 현실이 아무리 험악해도 꿈이 있으면 꿈이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으면 반드시 젖과 꿀이 흐르게 현실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이미 부정적이 되었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패배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마음에서 ‘못한다 안된다 할수없다 나는 실패자’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결단코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했는데 마음에서부터 실패의 쓴물이 넘쳐나는데 승리할 도리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생각이 부정적이면 패배는 기정사실입니다.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이미 그 생각에 패배자의 생각이 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무엘 스마일즈라는 심리학자는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쌓이면 성품이 되고 성품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운명은 생각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자화상에서 이미 패배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마음의 자화상에서 이미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패배자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대장부에 비해 자기들은 메뚜기라고 말했습니다. 메뚜기가 들어가서 뭘합니까? 벌써 패배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메뚜기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메뚜기는 깡충깡충 뛰다가 밟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메뚜기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한가지입니다. 아예 싸워 보기도 전에 나는 패배자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미국의 성형외과의사면서 심리학자인 맥스웰 말츠 박사의 말에 따르면 미국 인구 전체의 95%에 달하는 사람들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가정상담 사역의 권위자인 제임스 돕슨은 건강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가정주부들만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가장 큰 고민이 낮은 자존감, 즉 패배적인 자화상이었습니다. 불신자의 경우에는 80%가, 신자 중에서도 50%의 사람이 그렇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데이비드 시멘즈라는 학자는 “사단이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좋은 무기는 열등감이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패배적인 자화상으로 인해 생기는 열등감은 자신을 파괴하고 삶을 실패로 이끕니다. 사단이 그 틈을 타서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패배자의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이미 침몰하는 배와 같습니다. 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배자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환경을 믿었습니다. 환경을 보니까 안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보다 환경을 믿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주변 환경은 우리에게 제약을 많이 가져다 줍니다. 환경을 통해서 우리 감각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우리 이성을 통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출발하기 전에 패배자가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환경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뭡니까? 믿음이란 내 기분입니까? 아닙니다. 내 지식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때 회당장은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좌절하고 절망하며 무릎이 덜덜 떨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회당장의 귀에 대고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속삭였습니다. ‘두려움을 선택하지 말고 믿음을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감각이 아닙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믿을만한 감정도 없었고 감각도 없었습니다. 절망이 홍수처럼 휩쓸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자리에서 두려움을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선택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절대로 감정이 아닙니다. 믿을 생각이 안생기고 믿을 감정이 안생겨도 상관 없습니다. 마음속에 믿겠다고 선택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는 믿겠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선택하겠다. 나는 믿는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를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이런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배자의 말을 했습니다. 말은 우리를 묶고 사로잡습니다. 내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힘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말이 하나님의 임재를 모셔오며 말이 하나님의 능력을 모셔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보혈로 덮어 주시옵소서’ 그러면 입술의 말이 보혈로 나를 덮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짐승을 잡아 피를 우슬초에 묻혀서 뿌렸지만 오늘날은 피를 짐승에서 뽑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는데 그 피를 어떻게 우리가 우리 몸에 바르겠습니까? 말로써 바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내 몸을 덮어 주시옵소서’ 그러면 그 말로써 예수님의 피를 덮는 것입니다. 말이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접속시킵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으니 혀를 사용하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4장 1절로 3절에 보면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부정적인 말을 합니까? 파괴적인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이 저들을 사로잡고 이 말이 저들을 붙잡았습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말에 있는데 말을 죽도록 하는 것입니다. 패배의 말, 사망의 말, 좌절과 절망의 말을 하는데 그곳에서 승리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 처자가 포로로 잡힌다’ 그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그들이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잠언 6장 2절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언 18장 21절에도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다는 어마어마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죽고 싶으면 부정적인 말을 하십시오. 살고 싶으면 긍정적인 말을 하십시오. 실패하고 싶으면 못한다고 하십시오. 성공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고 말을 하십시오.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치 않는 말씀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3. 왜 우리는 패배할 수 없는가?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는데 이말 한마디만 우리가 깊이 묵상해 봐도 우리는 결코 마음속에 패배하는 생각, 패배하는 꿈, 패배하는 믿음, 패배하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패배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패배는 조상 때부터 시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정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닙니다. 환경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닙니다. 패배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패배를 중지시킬수 있고 고칠 수 있고 패배를 성공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 생각을 바꾸고 꿈을 바꾸고 믿음을 바꾸고 말을 바꾸면 운명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며 사랑하시는 대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마어마하게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사랑하셔서 하나님 것으로 택했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로 5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기뻐하시기 때문에 택하지 미워하고 안좋아하는 사람을 택할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엄청나게 사랑하시고 좋아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패배의식을 가집니까?
 성경에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다스리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종노릇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의 지위를 높여 주었습니까?
 창세기 1장 26절에도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다스리는 자로 만들었지 종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죄를 다스리고 환경을 다스리고 질병을 다스리고 저주와 가난을 다스리고 죽음조차 극복하고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왕으로 빚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에게는 축복권이 있습니다. 보통사람과는 다릅니다. 제사장은 특별히 하나님과 가깝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을 다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제사장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하나님이 제사장에게는 땅을 안주었습니다. 대신 내가 기업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하나님과 특별히 가까이 있게 하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내가 너희 기업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어떻게 살까’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중에 제사장은 기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업이 되셔서 하나님이 직접 먹고, 입고, 마시고, 사는 것을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백성들을 축복하는 축복권이 있어서 복을 빌면 복이 내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으로 우리를 삼아 주셨습니다.
 민수기 6장 27절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축복하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족을 위해서 축복하면 가족이 복을 받고 이웃을 위해서 축복하면 이웃이 복을 받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축복하면 나라와 민족에 복이 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왕으로 제사장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나라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니까.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주권자가 되시고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다스리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마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작은 천국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소유물을 돌보고 관심을 가지고 지키지 않습니까? 집도 내 집은 내가 돌보고 수선하고 깨끗하게 만듭니다. 논밭도 내 논밭은 관심을 가지고 지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바로 하나님의 소유물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보고 주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너희를 내게 주신 이는 만유보다 크시매 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21편 7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도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성공도 실패도 마음에 있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서 패배를 받아들인 사람은 설 곳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결코 마음에서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실패하고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축복받기 위해서,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자화상을 바꿔야 합니다. 말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패배를 내어 쫓아 버리고, 실패를 내어 쫓아 버리고, 마귀를 내어 쫓아 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8장 33절로 39절 말씀처럼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축복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문을 활짝 열고, 입을 넓게 열어 받아들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하신 주님, 능력과 권세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주시고 그 아들과 더불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를 받아들여 우리 생각이 긍정적이 되고 꿈이 긍정적이 되고 믿음이 긍정적이 되고 우리의 신앙고백이 긍정적이 되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