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나

by 삶의언어 posted Jul 07, 2024 Views 3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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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중략)…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3장 1∼6절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죄에 대한 형벌
죄로 인한 슬픔, 순종으로 기뻐하시는 하나님
단호한 결단 통해 성령님 의지해야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성결하게 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단번에 받되 주님의 형상을 닮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 됩니다. 마귀는 죄의 유혹을 갖고 성결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신앙의 삶이란 일평생 죄와 죄를 짓게 하는 마귀와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전쟁은 예수님께서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완전히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들이 거룩하고 성결하고 깨끗하게 되는데는 많은 투쟁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모든 범죄는 그 속에 천벌과 사라지지 않는 고통의 씨를 지닌다”고 말했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릅니다. 우리는 죄가 불법이요, 법을 어길 때는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1. 죄는 불법이요 형벌이 따른다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가차없이 형벌이 다가왔습니다. 아담은 죄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죄를 짓고도 평안하게 지낼줄 알았는데 죄의 결과가 너무나 엄청나서 아담과 하와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하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다가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벌거벗은 수치를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벌거벗은 수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광채와 영광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자마자 영광이 떠나고 순식간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0절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던 그들이 죄를 짓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반갑고 기뻤는데 죄를 짓자 하나님이 두려워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숨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생활속에 수고와 가난으로 나타났습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말할 수 없이 수고롭고 고생스러운 것은 저주의 결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나님은 땅이 저주 받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죽음이 다가오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즐겁게 지내던 그들에게 갑자기 죽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들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았을 때 그 비극적인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가 우리 육신의 옷을 벗기지는 않지만 양심을 벌거벗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의 양심이 벌거벗게 되면 마음에 고통이 다가오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양심이 벌거벗어서 마음에 개인적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번뇌하는 것입니다.

 시편 32편 3절에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입을 열어 죄를 고백하기 전에는 종일 마음에 고통이 있어 뼈가 쇠하여질 지경이 되었다 하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많은 육신의 병이 다가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고통으로 뼈가 쇠하여질 정도니 오장육부가 성할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병고침 받기 위해서는 너희 죄를 서로 구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보응을 받게 합니다. 마음에 죄가 들어왔는데 평안할 리 없습니다. 용서와 의가 들어오면 평안하지만 죄는 불안, 초조, 절망을 가져옵니다.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는 것은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레미야 45장 3절에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야훼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고 말씀합니다. 행복의 가장 큰 조건이 평안입니다. 죄는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났을 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군은 동경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온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경제 문제는 군대 문제입니다. 군대 문제는 정치 문제입니다. 정치 문제는 정치가의 양심 문제입니다. 양심 문제는 도덕의 문제입니다. 도덕의 문제는 종교 문제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연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종교가 바로서야 양심이 바로서고, 양심이 바로서야 올바른 정치를 하게 되고, 올바른 정치를 해야 평화가 다가오게 되고, 평화가 다가와야 경제도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 해결의 근본이 종교에 있고 종교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올바르게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예수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서 GNP가 향상 되었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마음에 깨끗함을 얻고 양심적인 삶을 살면 우리 사회가 평안하게 되고 우리 경제가 발전하고 향상될 것입니다.

 

 2. 죄는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가정에서 부모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자녀들이 다 평안하고 가정에 행복이 넘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상처를 입히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셔서 몸찢고 피흘려 대가를 지불하고 값주고 사셨으니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 앞에 눈동자와 같이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눈동자에 상처를 입히고 마음에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사야 1장 2절에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야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에 감정적으로 개입하셔서 기뻐하시고 안타까워 하시고 슬퍼하시고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때 마음에 근심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근심하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로 7절에 “야훼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한탄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째왕인 사울은 하나님이 택해서 임금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 중심으로 살자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의 사랑을 짓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생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고난받아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를 주님의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께서 아무 공로없는 우리들의 죄를 다 사해주시고 용서와 의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살면서 자꾸 죄를 지으면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엔도 슈사꾸라는 일본 소설가가 ‘침묵’이라는 소설을 지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선교하던 신부가 일본 도쿠가와 정권의 고문에 굴복하여 배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가장 존경했던 세 명의 제자가 생명을 걸고 일본으로 잠적해 들어가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은 결국 잡혀서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그 고문은 예수님 상이 새겨진 동판을 나무판에 붙여놓고 그것을 짓밟으라는 것입니다. 이 제자는 차마 예수님의 상을 밟고 지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내 상을 짓밟으라. 내 상을 밟고 지나가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서 세상에 온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와서 내가 안밟힐 때가 있었는가. 사두개교인, 바리새교인, 교법사, 대제사장 모두다 나를 짓밟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나를 밟고 지나가라!” 제자는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나는 원망했습니다. 왜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잠잠히 계십니까?” 그때 예수님이 “나는 침묵한 것이 아니다. 나는 늘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벌을 내리지 않고 괴로워하고 고통을 당하면서 참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힘이 없어 주님을 모욕하는 사람을 심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구원을 베풀려고 끝까지 참고 고통을 당하고 침묵을 하면서 끝까지 한사람이라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분 나쁘다고 심판하기 시작하면 남을 사람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이 침묵하는 이유는 그냥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짓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서는 안됩니다.

 

 3. 순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요한일서 3장 2절로 5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장차 예수님의 모습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 모습대로 우리도 변화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장사지내고 부활하고 승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목적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고 승천해서 예수님처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꿈꾸지도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할 영광스러운 미래가 우리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귀한 소망을 가지고 약속을 받은 이상 그리스도처럼 깨끗하게 살고 죄를 멀리하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버리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마귀를 똑같이 섬기지 못합니다. 마귀는 곧 죄이므로 죄를 하나님과 똑같이 섬기면 하나님을 모욕되게 하고 망령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보답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거룩하게 깨끗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라도 하나님이 제물로 내놓으라고 할때 두말하지 않고 순종하여 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장작을 펼쳐 놓고 아들을 묶어서 장작에 얹어 놓고 칼로써 그 목을 자르려고 한 것입니다. 독자 이삭이라도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내놓겠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과 믿음, 순종을 보십시오.

 창세기 22장 12절에 보면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듯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준행하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고 살면 하나님이 하늘의 복과 땅의 복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4. 죄를 거부하는 단호한 결단

 우리는 단호한 마음으로 결단해서 죄와 싸워 이기고 죄를 짓지 않고 살기로 마음에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6절에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멜산에 모아놓고 결판을 냅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에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야훼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십자가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루뭉실하게 섞여서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도 모시고 살고, 마귀하고도 평화롭게 지내고, 의도 행하고 죄도 행하고, 거룩도 행하고 불법도 행하면서 세상을 둥글둥글하게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기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욕을 하더라도 예수님이 칭찬하고 기뻐하면 그 길이 우리가 택해야 될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깨뜨려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야 됩니다. 마귀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종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와 마귀를 주인으로 섬기면 죄의 종이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에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육체의 정욕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했기 때문에 마귀와 귀신들이 매일같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이상 육체를 통한 육신의 정욕이 우리에게 항상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싸우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수 없습니다. 마귀와 귀신들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고 우리가 입고 사는 육체가 항상 우리에게 가시노릇을 합니다.

 로마서 8장 5절로 8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시대에 유명한 교부였던 암브로스는 육체의 정욕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삼손은 사자를 죽일 수 있었으나 자신의 정욕을 죽이지 못한 사람이었고, 삼손은 원수의 쇠사슬을 쉽게 끊을 수 있었으나 자기의 정욕의 쇠사슬을 끊지 못한 사람이었다. 삼손은 원수의 보리밭에 불을 지를 수 있었으나 자기는 한 여인이 지른 정욕의 불에 타 죽어 버린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돈, 지위, 명예, 권세, 쾌락, 이생의 유혹 등의 육체의 정욕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삼손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 성령의 기름부음이 넘치는 사람이라도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데릴라의 유혹에 빠져 결국에는 눈알이 빠지고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기억하고 항상 마음에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 눈에 안보이는 바람과 같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도우시는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것입니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항상 도와 주어야 어린 아이가 넘어져 상처입거나 위험한데 빠지지 않고 잘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손길이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고 성령님과 함께 살아야 죄악을 이길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중에 자신들의 힘으로 광야를 지나갑니까? 낮에는 구름기둥이 있고 밤에는 불기둥이 있어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순종할 때 그들은 광야를 지날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우리에게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해방을 받은 사람이고 끊임없이 해방되고 있는 이유는 성령이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은 해방자이십니다. 스스로 죄악을 이기고, 거룩하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설수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에서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도 마귀와 귀신의 공격을 받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의 유혹을 받고 있는데 자기의 힘으로 이길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원수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이기고 또 이기게 하시는 성령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십자가 없이 구원받을수 없는 것처럼 성령없이 우리가 거룩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단번에 믿음으로 용서와 의롭다함을 얻은 우리들은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매일매일 싸워서 육체의 정욕과 마귀를 이기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믿고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영광을 얻었으나 거룩하게 사는 일에는 끝없는 투쟁과 싸움이 필요합니다. 이 투쟁과 싸움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와 계신 것을 감사합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심으로 항상 성령님께 의지하고 성령님의 손을 잡고 죄와 마귀를 이기고 거룩하고 성결하고 깨끗하고 진리를 따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