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의로운 죄인과 더러운 죄인

by 삶의언어 posted Jul 12, 2024 Views 6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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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장 9∼14절


더러운 죄인도 회개하면 하나님께 의롭다함 받아
교만과 자기 우상화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
자기 죄 고백하고 회개할 때 살 길 열어 주셔


 누가복음 18장 9절로 14절에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두 사람 다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또 다른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기 공적을 자랑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2절을 보면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 아닙니까? 또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반드시 드렸다고 하니 그 행위를 흠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8장 11절에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지만 자만과 자기 우상화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인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죄만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교만한 죄를 특히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자기 공적을 자랑하고 자기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교만과 자기 우상화를 했습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죄인 것입니다. 소위 ‘의로운 죄인’입니다. 성경에는 “무릇 마음이 교만하는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이 성전에 예배 드리러온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세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세금을 착취해서 자기도 부자가 되고 그중에 많은 세금을 로마 사람에게 바치기 때문에 민족 반역자로 생각했습니다. 죄인의 대표적인 대명사로 세리를 취급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자백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의로운 죄인이고 이 세리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자기 교만, 자기 우상화하는 의로운 죄인보다 낮아지고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깨어져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입고 나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드렸는데 자기 자랑하는 바리새인은 하나님께서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죄인인 것을 자백한 세리는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시고 축복해서 내보내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정신적인 교만을 가지고 자기를 의롭다하고 남을 멸시하는 의로운 죄인들입니다. 솔직히 더러운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자복하고 두 손 들고 나오는 사람은 주님이 용서하고 씻어주시고 의롭다하고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둘째 아들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탕자입니다.

 

 1. 둘째 아들 (더러운 죄인)

 

 둘째 아들은 대표적인 더러운 죄인입니다. 그는 아버지 밑에서 일하기가 싫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귀찮았습니다. 아버지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서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자기의 속한 분깃을 나누어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로 12절에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간청해서 자기 몫을 받고 난 다음 그는 그 돈을 다 정리해 먼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하지 않는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했습니다. 언제나 허랑방탕하면 기근이 다가옵니다. 이 세상에서도 주지육림 속에 사는 사람치고 가난해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도 한가지입니다. 허랑방탕하게 지구자산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에 공기가 오염되고 물이 오염되고 산림이 훼파되고 자원이 고갈되고 온 세상이 점점 기근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요사이 석유자원 고갈로 석유 값이 오르고 산업화에 크나큰 충격이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방탕하면 가난하게 됩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국제사회가 똑같습니다. 허랑방탕한 결과로 이 아들은 큰 기근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따르던 친구들도 다 떠나가고 자기를 우상화하던 여자들도 다 떠나가고 먹고 입고 마시고 살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을 구하나 좋은데 구할 수가 없고 도시 사람이 농촌에 돼지 농장을 하는데 거기에 돼지 치는 사람으로 고용이 되어서 갔습니다. 유대인에게 가장 천한 직업이 돼지 치는 것입니다. 그는 돼지를 치면서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얻어먹으려고 하다가 돼지에게 물리고 발길로 차이고 짓밟혔습니다. 고달프고 괴로워질 때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부귀, 영화, 공명이 다 있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우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 그래서 품꾼으로라도 고용되어서 호구지책이라도 세워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깨어지고 항복하고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면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더러운 죄인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8절로 19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달프고 괴로워지면 정신이 듭니다.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 때는 교만하고 오만해져서 자기의 진정한 상황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괴로워지면 자기의 본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입니다.
 1970년대의 한 인기가수가 대마초를 피우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3개월 동안 복역했는데 그곳에서 한 사형수에게 전도를 받았습니다. 이 사형수가 어찌나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던지 그 태도에 감동을 받아 이 가수도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게 되자 사형수는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면 내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 못한 몫까지 일해 주세요” 이 가수는 대마초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스스로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만큼 의로운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사형수를 만나 전도를 받고 복음을 들으면서 점차 자신이 추악한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그는 신학을 공부했고 현재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왜 사형수가 구원받기 쉬운지 압니까? 사형수는 자신에 대해 절망했기 때문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절망하지 아니하면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교만하고 자신만만해서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절망한 사람이 비로소 자기를 도와주고 건져줄 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왜 감옥에 들어가면 밖에 있을 때보다 예수 믿기가 쉬운지 아십니까? 감방에 갇혀 있다 보면 자신에 대해 절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고달프고 비참해지면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가수도 한창 인기를 얻고 활동할 때는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다가 감옥에 갇혀 절망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깨어지고 항복해서 주님을 구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깨어지고 항복해야 비로소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더러운 죄인인 아들은 돼지농장에 가서 돼지를 치는 비참한 자리까지 낮아지고 난 다음에야 제정신이 들어서 자기에 대한 실망이 아버지께로 돌아오겠다는 회개의 마음을 일으켜 준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 아들이라 칭함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그런 고백을 해도 아버지는 거기에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식은 아버지가 과거를 문책하지 아니하시고 꼬치꼬치 캐어서 책망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받아들이고 품에 품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반지를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우리 즐거워하자.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라”고 말한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도 꾸짖지도 아니하시는 절대 사랑을 가진 아버지, 이가 바로 하나님 우리 하나님 아버지인 것입니다.

 

 2. 첫째 아들 (의로운 죄인)
 
 첫째 아들은 외면적으로 볼 때 정말 의로운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5절에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왔다 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창기와 아버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쓰고 있을 동안에도 맏아들은 집에서 밭에 나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29절에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아버지 명령을 충실히 순종하고 방탕하지도 아니하고 바르게 사는 의로운 아들입니다. 누가 봐도 맏아들은 착하고 충성스럽고 의롭고 훌륭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는 의로운 죄인입니까? 육신적인 더러운 죄는 안 지었어도 정신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자기 공적에 잡혔습니다. 자기 자랑에 자기 스스로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에 대한 비평과 적개심을 가졌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미워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8절에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상을 베풀었는데 노해서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30절에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적개심이 꽉 들어찼습니다.
 맏아들은 외면적으로 볼 때는 충성스럽고 헌신적이고 착한 아들 같지만 마음속에서는 탕자였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공적으로 나타내고 자기 자랑하고 돌아온 동생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반발했으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이 꽉 들어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으로 방탕은 안했지만 정신적인 탕자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깨어져 회개하고 아버지 뜻대로 살겠다고 돌아온 더러운 죄인을 동생에 대한 비평과 적개심을 가지며 아버지를 원망하고 반항한 첫째 아들보다 사랑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둘 다 아버지 아들입니다. 둘째 아들은 더러운 죄인입니다.이 세상이 다 아는 더러운 죄인이지만 회개하고 깨어져서 두 손 들고 항복하고 나올때 아버지가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열심히 일하고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방탕도 하지 아니하고 집도 안 떠났지만 그는 그 마음속에 돌아온 동생에 대한 원망과 적개심을 가지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반항의 마음이 마음에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의로우나 속으로는 탕자였었습니다. 의로운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죄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결국 동생은 잔치에 참여했지만 의로운 죄인인 형은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즐거움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역시 맏아들은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자기 자랑과 자기 공적과 자부심을 갖고 이웃을 비평하고 이웃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며 하나님에 대해서 속으로 원망하고 반항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깨어지고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 칼 바르트는 이제까지 깨달은 가장 위대한 신학의 진수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3. 우리의 살 길

 

 그렇다면 우리의 살길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의롭고 업적과 공적이 있다고 자기를 내세우면 절대로 안 됩니다. 만가지 공을 세워도 자기 자랑 한마디하면 그 공은 하나님 앞에서 다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첫째 아들처럼 의로운 죄인이 되어 하나님께 외면을 당합니다. 우리 자신이 더러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기를 완전히 깨뜨리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고 나올 때 하나님은 두말하지 않고 과거를 묻지 않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품어 주시고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로 6절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데 우리의 더러운 행위 몇 푼 가지고서 그 값을 지불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은 은혜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햇빛을 돈으로 계산하지 못합니다. 너무나 값이 비싸기 때문에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공기도 돈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짜로 받아 숨쉬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냥 공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행위로써 계산할 수 없어 대가를 지불할 수 없습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없는 은혜를 우리는 잊으면 안 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자랑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오늘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절대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 때문에 된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기를 완전히 깨뜨리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어도 이 땅에서 우리 힘으로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사 우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또 다른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보혜사란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항상 우리곁에 계신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서재를 1층에서 2층으로 옮기는데 책을 잔뜩 들고 2층에 가 있는데 아래층에서 어린아이가 죽는 소리를 합니다. 놀래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 보니 막내 아이가 아버지가 책을 들고 가니까 자기도 아버지를 도와 책을 2층으로 나르겠다고 자기 몸집만한 사전을 안다가 못 일어나고 사전에 깔려 고함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무 귀여워서 어린아이와 사전을 함께 안고서 2층을 올라갔습니다. 어린아이는 사전이 무거워서 거기에 깔리지만 아버지는 어른이기 때문에 사전과 어린아이도 함께 안고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는 힘이 약해서 짊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죄악에 깔려서 비명을 지르지만 성령은 우리를 함께 안고서 천당으로 데려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못가도 성령님은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못 메어도 성령님은 짊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의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 연약함을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 심적인 생활, 육체적 건강, 사회, 생활을 돕는자 보혜사 성령께서 항상 같이 해주셔서 붙들어 주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고 천국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나온 것도 성령이 도와 주셔야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마귀의 유혹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성령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 끊임없이 은혜를 베푸시고 능력으로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옛사람 즉 거짓 하나님으로 행세하고 자기를 우상화하여 자랑하고 추켜세우는 의로운 죄인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서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버림받지 말고 자기의 죄인 됨과 절대적인 무능력자임을 고백하고 옛사람의 십자가에서 심판하고 폐기처분하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에 감격하여 뜨거운 감사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밖에 자랑할 것이 없고 예수님의 은혜밖에 자랑할 것이 없고 성령의 감화, 감동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지 우리가 잘나서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은 정신적으로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한 사람을 하나님은 무서운 죄인으로 취급하십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의로운 죄인 되지 말고 참으로 잘못된 더러운 죄인인 것을 고백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맏아들처럼 겉으로 의로운체하나 속으로 탕자가 되지 말고 둘째 아들처럼 탕자였으나 진실로 깨어지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더러운 죄인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변화되고 구원받는 것을 알고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미하며 믿고 영광 돌리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