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하나님보다 더 신령한 사람들

by 삶의언어 posted Jul 13, 2024 Views 6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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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서론>
“하나님보다 더 신령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가끔 하나님보다 더 신령한 척하는 사람들을 만나보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질은 악한 것이다. 금과 은을 소유하는 것은 신령하지 못하다. 가난하게 살아야 거룩하고 신령하게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잘못하신 것인가요? 하나님께서는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으니 금과 은을 소유하신 하나님은 신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까?
학개 2장 8절에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시편 50편 10절로 11절에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살아야 거룩한 것이라면 천국에는 전혀 가난함이 없으니 천국 시민들은 모두 다 거룩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모든 물질을 지으신 하나님은 신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천지의 은금을 다 갖고 계신 하나님은 신령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극히 부요하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물질이나 금이나 은, 부요 그 자체는 죄도 아니요, 악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중립이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보다 그런 것들을 더 사랑하면 죄가 되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탐하여 부정하게 소유하려고 할 때 많은 시련과 고통과 유혹과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물질에 부족함이 없고 금과 은을 소유하며 부요하게 살고 그리고 신령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본론>
1. 가난의 기원
첫째로, 가난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에덴동산에는 가난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지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섬기며 살 때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예비하신 에덴에서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나고 네 강이 발원하여 정금과 각종 보석이 있는 땅이라고 창세기 2장 11절로 12절에 말했습니다. 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여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부요하고 풍부한 환경 속에서 다스리는 왕으로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 땅이 저주받은 땅이 되었습니까? 왜, 하나님이 지으신 복스럽고 아름다운 땅이 저주에 꽉 들어찬 땅이 되고 말았습니까?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를 섬기며 살려고 하나님을 반역했을 때 에덴에서 쫓겨나고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어마어마한 비극이요, 저주의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에도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을 떠났으니까 아담과 하와도 저주를 받고 땅도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삶의 시작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예비해 주신 것을 값없이 은혜로 누리고 살았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담 스스로 삶을 위하여 일하고 예비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되고 그 결과 가난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부모 슬하에 살 때는 부모가 다 예비하고 준비해 주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이 무엇인지 몰랐지만은 부모 슬하를 떠나서 살게 되면 이제는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디에 살까를 예비해야 되므로 그때부터 무거운 짐을 지게 되고 수고로운 일을 해야만 하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 되셔서 끝없이 생수가 넘쳐 나올 수 있는데 그 근원된 하나님을 저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저축되지 않은 터진 웅덩이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을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웨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웨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지키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가난이 복인가 저주인가?
둘째로, 가난이 복인가 저주인가를 우리가 알아보아야 됩니다.
가난을 짊어지고 살아온 세대를 뒤를 돌아보면 여러분 가난이 복이 아니고 저주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일정 36년 동안 살아온 우리 근대사를 보십시오. 가난이 얼마나 철천지원수가 되어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남부여대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조국 땅을 떠나 간도로 이민 간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정 36년 동안에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남자가 32.4세, 여자는 35.1세로 평균 33.7세에 불과했습니다. 얼마나 못 먹고 영양실조가 되고 병들었던지 평균 33.7세에 불과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짧게 살았습니까? 요사이 33살에 죽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일정 36년 동안에는 33.7세가 평균수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2003년 현재 남자가 72.8세, 여자가 80세 평균 76.5세로 무려 43년이나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일정시대에 사는 사람보다 우리가 43년이나 더 많이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똑같은 한국 땅인데 똑같은 산수가 있는 그곳에 사는데 그때보다 엄청나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영양실조가 없고 의학시설이 풍부하게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난할 때 산 사람들의 생명이 그렇게 짧았으나 부요하게 살 때 수명이 이렇게 늘어난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6.25 전쟁을 기억해 보십시오. 6.25 전쟁은 우리민족에게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국 강산이 다 불타버렸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도 죽고 굶어 죽지 않았습니까? 해방을 당한 우리나라는 채 10년도 못 되어 6.25 전쟁이 터졌지요. 그 바람에 가난과 굶주림은 더 심해졌습니다. 전 국민의 4분의 1이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남북한 군인만 해도 280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민간인 사상자만 250만 명이 생겼습니다. 전쟁 미망인이 무려 30만 명이 넘었고 이들 중 대부분이 먹고 살기 위해서 중노동을 하고 혹은 몸을 팔기도 했습니다. 전쟁고아가 10만 명이나 생겨서 돌보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아이들은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버린 음식을 주워 먹고 살았습니다. 지금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이 바로 50년 전 우리의 모습입니다. 수도 없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재앙을 연구해온 해롤드 포스트는 6.25 전쟁을 세계 역사 중 제4의 대재앙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 6.25사변을 통한 세계적인 재앙을 만나서 우리가 겪은 것이 가난입니다. 얼마나 헐벗고 굶주리고 배고프고 그로 말미암아 죽어 가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가난과 굶주림이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은 무시무시한 재앙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누가 가난이 축복이라고 말합니까? 누가 가난이 거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가난한 현실을 보십시오. 제3세계의 기아는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북한의 참상은 95년에서 98년 사이에 350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350만 명입니다. 어린이 62%가 영양실조에 걸려있고 결핵환자수가 400만 명이니 북한인구 5명당 1명이 결핵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7장 9절에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저버리고 저주와 가난과 궁핍 속에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국제연합산하기관인 세계식량계획은 세계의 기아인구가 8억 2천 6백만명에 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만성적인 영양결핍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중에도 특히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더 큰 피해를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 천여 명의 여자들이 간단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매년 2만 명의 어린이들이 야채와 70원만 있으면 살 수 있는 비타민제를 먹지 못해 눈이 실명되고 있으며 매년 1천 4백만 명의 아이들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데 이는 7초에 한 명 꼴로 굶주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난이 복이라고요? 얼마나 몸서리치는 저주가 아니고 뭡니까? 한 보고서에 의하면 현지 아프리카는 24개국 1억 5천만 명이 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으며 사상 최악의 기근으로 농작물의 95%가 말라 죽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은 저주입니다. 축복이 아닙니다.
신명기 28장 15절로 19절에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신명기 30장 19절로 20절 우리 다같이 소리내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유대인의 탈무드에 나오는 유대인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명의로 소문난 의사가 있었는데 다른 의사들에게 가서는 병이 절대로 안 낫는 사람들이 이 의사선생에게 가면 척척 나아요. 그런데 어느 날 한 환자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저는 지병으로 평생 고생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유능해서 어떤 병이라도 고친다고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제 병을 좀 고쳐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의사가 “어디 아픈데를 좀 봅시다.”라고 하며 진맥을 하려고 하니까, 두 손을 내어 저으면서 “아니요, 선생님 아니요. 제병은 몸에 든 병이 아닙니다. 저의 병은 다름 아닌 가난병입니다.”
그러자 그 명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몹쓸 병에 걸렸군요. 그 병은 저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가난은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저주받은 병입니다.”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가난병은 저주받은 병이요, 가난병은 나라도 책임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앤듀 매튜스라는 학자는 “종교적 가르침은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라고 했지 우리들에게 가난해지라고 설파한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 성경에 가난해지라고 말했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라고 말씀했지, 스마일스는 “악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에 대한 애착”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 가난은 하나님의 본뜻이 아니다
셋째로, 가난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에덴동산부터 하나님은 가난을 지은 적이 없잖아요.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을 보십시오. 얼마나 부요하고 풍성하고 아름답습니까? 가난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을 꾀한 것으로 스스로 자처한 형벌인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로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복주시기를 얼마나 원하시는 것을 볼수 있어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사람을 복 주실 뿐 아니라 그 복은 사람이 기르는 우양의 새끼까지 복을 받겠다. 생활과 환경에 하나님이 축복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로 10절에도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냥 구하는 것 아닙니다. 간절히 소원하는 바는 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한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시련은 많았지만 가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크게 복주어 창성케 하셨습니다. 많은 우양과 은금과 약대와 나귀와 노비들을 가진 것이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 아들 이삭은 하나님이 복 주셔서 한해 농사를 지어 백배나 소출을 얻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손자 야곱은 빈손들고 외삼촌 집에 갔지만은 나중에 돌아올 때는 가축 떼 두 떼와 많은 노비들을 거느린 동방에서 제일 큰 부자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갈라디아서 3장 9절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우리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은 즉 아브라함과 함께 신령한 복에 보태어서 물질적인 복도 받게 되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곧장 이런 말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라고 했으니 예수님처럼 가난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맞아요. 예수님 가난하셨어요.
마태복음 8장 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풍찬노숙을 하시면서 사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 당한 이유는 우리의 가난을 대속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내가 가난했으니 나를 따라 오너라. 나처럼 풍찬노숙하고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풍찬노숙을 하고 사는 이유는 너희로 부요케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부모가 허리띠를 매고 굶주리면서 수고하고 고생한 것은 자식에게 그런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지 내 부모가 허리띠 묶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시니 너도 대물림으로 가난해라 그런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심지어 주님께서 저주를 받기까지 하면서도 우리에게는 복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기원은 우리가 가난하지 말고 저주받지 말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4. 신령하면서도 부할 수 있는가?
넷째로, 신령하면서도 부할 수가 있는가 하고 물을 것입니다.
“부한 사람은 신령하지 않잖아. 신령하면서도 부할 수가 있느냐?”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순서를 바로하고 살면 금과 은을 아무리 가져도 그 사람은 신령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할 것과 나중할 순서를 바꾸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와 하늘 의를 먼저 구해야 됩니다. 영원한 것을 먼저 구해야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먼저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사는 삶을 먼저 구하면 그 다음에 일시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주님이 더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절대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신령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지 않아요.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살면 이야말로 거룩하지 않습니다. 세속적이고 탐욕적이고 마귀의 종이 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주인으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단호하게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절대복종하고 믿고 의지하고 섬기면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고 하나님이 채워 주시고 하나님이 열매 맺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인이 거룩한데 주인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주인으로 우리 인생에 앉아 계시는데 우리 하나님 계신 우리 인생이 거룩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 주인으로 모시면 모든 삶을 주인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청지기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잘 쓰라고 맡겨준 청지기 역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8절로 10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겠는가?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요? 여기 하나님의 것, 나의 것이라고 주님이 단호하게 소유를 주장하는 것이 우리 수입의 십일조인 것입니다. 우리 수입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청지기 노릇을 잘해서 하나님의 소유를 반드시 하나님께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까지 훔치고 도둑질하고 난 다음에야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저주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둑 중에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은 대도둑입니다.
잠언서 3장 9절로 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옛날에 김익두 목사님이 재령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입니다. 원래 김익두 목사님은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 김익두 목사님이 가서 복음을 증거하면 병든 자가 인산인해로 모여왔고 많은 사람이 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재령에서 부흥회 할 때 한 남자가 오더니 안수를 하고 있는 김익두 목사님의 손을 꼭 잡고 놓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본시 건강하니까 건강을 위한 안수는 필요 없고 물질의 축복이 필요한데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자꾸 흔들려서 십일조를 못내고 있으니 목사님께서 제게 십일조 안수를 해주십시오.”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두루마기의 소매를 쫙 찢어 가지고서 그것을 묶어서 주머니를 만들어 가지고서 그것을 주면서 “당신이 물질의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항상 이 주머니를 갖고 다니면서 수입에서 들어오는데로 여기에 철저하게 십일조를 넣어서 교회에 바치시오.” 그리고 안수를 해주었습니다.
그 남자는 장마다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장돌뱅이였는데 그 후로는 이 십일조 주머니를 꼭 옆구리에 차고 다녔습니다. 10원을 벌면 1원을 넣고 100원을 벌면 10원을 넣었습니다. 그 모습을 하도 신기해서 사람들이 “그게 뭐요?”하고 물으면 “이것은 십일조 주머닌데 나에게는 축복의 주머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축복해 주셨던지 한낮 장돌뱅이에 불과했던 그가 재령에서 제일가는 재벌이요, 황해도에서 헌금을 가장 많이 드리는 장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바로 재령교회의 정찬식 장로입니다.
여러분, 평범한 장돌뱅이가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물을 정성으로 드리고 하나님을 의지한 결과로 일약 거부가 되고 교회사에 이름이 남는 장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착실한 청지기 역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훔치고 난 다음에 주인이 그 청지기를 계속해서 고용하겠습니까? 파면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 언제나 심고 거두는 법칙을 생각하고 무엇으로 내가 심어 놓든지 심어야 거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농부가 아무것도 안 심고 거두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엇을 심든지 심어야 거두지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지요. 사랑으로 심으면 사랑을 거두고 미움으로 심으면 미움으로 거두고 심판으로 심으면 심판으로 거두고 비난으로 심으면 비난으로 거두고 이 세상에 심고 거두는 법칙은 우주적인 법칙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죄악으로 심어놓고 버린다고 해서 안 거두는 것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로 7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애 속에 심는 것을 보시고 거두게 하십니다. 영적으로도 생명으로 심으면 생명으로 거두고 사망으로 심으면 사망으로 거둡니다.
시편 37편 1절로 2절에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행악을 하고 죄악을 하면 우리가 세상에 푸른 하늘밑에서 저런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해도 하나님이 내버려 두냐고 하지만 성경은 말씀하기를 심은 대로 거둔다. 푸른 채소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임에 쇠잔해지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도 한가지입니다. 봉사도 한가지입니다. 물질을 심든지 시간 내고 몸 들여 봉사하든지 심은 대로 내가 거두지 않으면 내 자손 대에라도 거두는 것입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교회 건축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담임목사인 챔부스 목사님이 이 문제를 놓고 새벽기도를 하고 있는데 새벽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목사님은 의아하게 생각하여 문을 열었는데 그곳에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벽돌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존이라는 소년이 서 있었습니다.
“존 이렇게 이른 새벽에 웬일이야?”
“목사님 이렇게 일찍 와서 죄송합니다. 새벽이 아니면 시간이 없어요. 목사님께서 어제 예배에 교회당을 짓는 데는 돈도 필요하지만 물건도 필요하다고 하셔서 제가 노동하는 공장에 벽돌 한 장 한 장씩을 사장님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모아서 이렇게 한 수레에 벽돌을 싣고 왔습니다. 이 벽돌도 교회당 짓는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추운 이른 아침에 소년이 와서 버들버들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와락 소년을 끌어 앉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까지 내리는 이 추운 새벽에 벽돌을 한수레나 끌고 왔단 말이냐? 고맙구나. 존, 너무너무 고맙구나. 지금 나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거야. 너의 정성과 아름다운 마음은 일만달러 보다도 백만 달러의 기부보다도 더 귀하단다. 하나님 대신해서 내가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초등학교도 못 나온 존 워너메이커는 그 길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은총과 축복을 받아서 나중에 미국에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는 존 워너메이커가 되고 미국의 재무부장관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토와 거름무더기에서 일으켜 세워서 세계적인 부호로 만든 것은 심고 거두는 법칙을 잘 사용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가 비록 벽돌 한 수레를 심었지만 거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마음이 함께 심어진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것을 받는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해서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의 생애를 영화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가지면서도 신령하게 살기 위해서는 물질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물질이 있으면 물질에 애착을 가지고 수전노가 되지 말고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하실 때 풍부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풍부하고 구제도 풍부히 하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실 때는 아낌없이 물질을 드릴 줄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물질에게 밀려서 다니면 그것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물질에 애착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쓰라는 곳에는 언제든지 써야 됩니다.

저는 예전에 스페인의 라스팔마스 순복음교회 성회를 인도하였습니다. 라스팔마스 교회는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아주 등대와 같이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누가 지었냐면 그 교회에 나오는 집사님 한 분이 교회를 지었습니다. 교회가 꼭 필요하니까 건물을 사서 수리해 세워야 되겠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 집사님은 회사에서 일하다가 피땀 흘려서 모은 집 한 채가 있었는데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그 집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몽땅 집을 바쳐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회사를 그만두고 빚을 내서 배를 한 척 사서 그 이름을 할렐루야 1호라고 붙였습니다.
금식하며 기도로 출항준비를 했습니다. 그런 다음 할렐루야 1호를 바다에 띄웠는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서는 대게 배가 바다에 나가서 조업을 하면 70일 동안에 약 30만 달러 정도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70일을 조업하면 약 3억 원 정도의 고기를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사님 배가 바다에 나간 지 40일 만에 70만 달러의 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반도 안 되는 일수에 7억 가까운 수입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상 최대의 어획량이었습니다. 결국 집사님은 한배에 판매금으로 단번에 빚을 다 갚았다고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가진 최상의 것을 드리자 하나님께서는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준 것입니다. 물질에 애착을 가지고 하나님이 쓰라고 하는데도 안 쓰고 자꾸 벌벌 떨면 하나님은 그 물질에 저주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물질은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가 자꾸 그것을 매달리면 안 됩니다. 주시는대로 많이 주면 많이 주시는대로 적게 주면 적게 주시는대로 언제나 갈릴리 호수처럼 내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갈릴리호수는 요단강에서 물이 들어와서는 고여서 사해로 흘러내려 보냅니다. 그러므로 갈릴리호수는 언제나 푸르고 물고기가 살고 주변에 땅들이 그 물로써 곡식이 잘 지어집니다. 그러나 사해물은 같은 요단강물을 받아들이면서 흘러내리지 않기 때문에 소금기가 많아서 생선도 살지 않고 물은 죽은 물이고 그 주변에는 다 사막화 되었습니다.
물질은 사람과 환경을 살릴 수도 있고 사람과 환경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노예가 되지 아니해야 우리가 물질을 가지면서도 신령한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과 함께 벌고 소유한 물질은 결코 악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때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 성취되지 않습니까? 그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지어지고 자선사업이 이뤄지고 병원이 세워지고 수많은 고아들이 노인들이 돌봄을 받지 않습니까? 가난 그 자체는 몸서리치는 저주입니다. 가난 그 자체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가난해도 그것을 이기고 낙심치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그 신앙심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심입니다. 그러나 가난 그 자체는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이지 축복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주님께 축복을 받아서 남을 축복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빈손 들고는 이웃에 아무 축복도 안 됩니다. 빈손 들고는 하늘나라를 세우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우리가 나누기 위해서 먼저 받아야 되며 남에게 채우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주님 앞에서 항상 기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가난이 축복도 아니고 신령한 것도 아니라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나누어 주고 입히고 먹이는 일에 힘을 실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