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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고난과 소망

by 삶의언어 posted Jun 15, 2024 Views 2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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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고난과 소망’이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였던 빅터 프랭클 박사는 2차대전 당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의 아우슈비츠에 갇혀서 모진 고난을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경험과 나치 독일 치하에서 죽은 600만 유대인에 대하여 연구하여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라는 제목의 책을 지었는데 그 책은 유명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소망이 갖는 놀라운 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심신이 쇠약해져서 죽고 말았지만,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은 살아남았다. 절망하는 동료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었던 사람들, 또한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남았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의 책에서 소망의 위대한 힘에 관해서 증언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난과 소망이 교차하는 종교입니다. 바울선생은 이 역설적인 면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8절로 10절에 우리들이 신앙생활 할 때 체험한 바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난과 소망도 이와 같은 역설적인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즉, 주님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그 안에 놀라운 소망의 씨앗이 심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고난을 통과할 때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의 씨앗이 심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가장 극적으로 증명된 것이 요셉의 생애입니다.

[본론]
1. 요셉이 당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첫째로, 요셉이 당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우리가 같이 알아보겠습니다.
요셉은 모든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에 열한 번째인 요셉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들에서 양치기를 했어도 요셉은 채색옷을 입고 집에 거하며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창세기 37장 3절로 4절에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채색옷을 입는다는 것은 장차 아버지 후계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고급천의 긴겉옷을 지어서 왕의 자녀나 귀족들의 아들들에게 입힌 옷인데 형들 다 제켜 놓고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 채색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니 형들의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형들이 그러므로 요셉에 대해서 심사가 편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요셉에게 두 번 희한한 꿈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번은 꿈에 형들하고 추수를 갔는데 자기 단이 가운데 서고 열한 단이 둘러서서 절하는 꿈을 꾸고 형들에게 그것을 고하니 형들이 굉장히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를 향해서 절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이야기하니 형들의 불평이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이야말로 장차 요셉이 당할 억센 고난 속에 생겨진 소망의 씨앗이었습니다. 장차 요셉은 형언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 중에서 하나님은 이미 요셉의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소망의 씨앗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이 소망의 씨앗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가를 조금 지나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형들에게 굉장한 불평을 당하고 미움을 받았지만, 그 꿈이야말로 요셉으로 하여금 장차 다가올 어마어마한 고난 중에서 이겨 나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된 것입니다. 요셉을 아버지가 하루 부르셔서 “형들이 들에서 양을 치니 형들의 안부도 물어보고 내가 준비한 음식도 형들에게 전하고 오너라.” 그랬습니다. 형들을 찾아서 들에 나갔는데 형들이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성경 창세기 37장 19절로 20절에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이 말을 읽어 보아도 형들이 요셉의 꿈에 대해서 얼마나 분괴하고 미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꿈꾸는 놈이 온다. 우리 잡아 죽여 버리자! 그 꿈이 과연 어떻게 되는지 보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쉽게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꿈은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람이 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꿈이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에게 달려들어서 그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마른 우물에 던져 놓고 요셉이 가져온 음식을 즐겁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 했습니다. 요셉은 캄캄한 마른 우물에 던져졌습니다. 사람이 없는 들판입니다. 형들이 곧 음식을 먹고 양무리를 이끌고 다른 들판으로 가버리면 그는 적막강산에 굶어 죽을 것입니다. 그런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요셉이 그것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속에 꿈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른 우물과 좌절과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생각했습니다. 형들이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는 꿈을, 이곳에서 죽으면 장차 형들이 자기 앞에 엎드려 절하지 못할 것 아닌가.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칼이랴.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내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은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그 확신이 그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그 좌절과 절망 중에서도 그 꿈을 생각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꿈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꿈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보십시오. 형제들이 요셉이 가져온 음식을 먹고 있다가 마침 그때에 미디안 상고들이 이스라엘의 길르앗에 가서 향품들을 사서 애굽에 팔려고 대상이 지나가니 유다가 말하기를 “야~ 우리 동생을 저 마른 우물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 종으로 팔아버리면 돈벌이를 할 수 있잖느냐? 그 돈벌이 될 애를 죽이지 말고 우리 팔아먹자.”
여기서 보십시오. 꿈이 사람을 다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침 그때 어떻게 미디안 대상이 지나갑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이미 꿈을 통해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장 28절에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여기를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꿈을 품으면 꿈이 우리 자신을 이끌어 갑니다. 꿈이 우리들을 만들어 갑니다. 요셉이 마음속에 꿈을 품고 있으니 그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마른 우물에 던져 넣었지만 꿈이 그 모든 환경을 제압하고 승리하여 요셉을 미디안 대상들에게 팔도록 이끌어가고 요셉이 종으로 끌려서 애굽으로 내려가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는 종으로 끌려 내려가면서 다시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절망감과 형들에게 대한 뼈저린 배신감 때문에 마음에 고통을 당하고 몸서리쳤을 것입니다. 요셉은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실까? 이 꿈을 주신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실까?”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나 싶은 고통스러운 심정을 가지고 불안과 공포에 떨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17절로 18절에 보면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우리도 그런 체험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믿고 마음속에 꿈을 품었어도 현실이 너무나 처참하고 어려우면 ‘하나님이 과연 나를 도와주실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았는가?’ 그러한 마음에 절망을 느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역경에 처했어도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요셉에게 이미 희망의 씨를 심어 놓은 것입니다. 아무리 어둡고 캄캄해도 그 가운데 희망의 씨앗이 이미 심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크고 적은 시험과 환난과 고통, 캄캄한 밤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그 캄캄한 밤중에 이미 희망의 씨앗이 심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절대무능력, 인간적인 절망에 처했을지라도 마음속에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희망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참고 견디면 때가 오면 그 씨는 반드시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유태인 랍비 휴거그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집단 수용소에 갇혀 온갖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자신의 경험을 독일의 데르모르겐이라는 잡지에 기고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날은 1944년의 몹시 추웠던 겨울날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저와 또 몇 명의 친구분들을 건물 한구석으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진흙으로 만든 주발과 버터 한 조각을 꺼내었습니다. 버터는 당시 수용소에서 구하기조차 어려웠던 것인데 아버지는 그 버터를 녹이시더니 거기에 심지를 적셔서 불을 붙이셨습니다. 제가 ”왜 그 귀한 버터를 먹지 않고 낭비하느냐고 항의했더니 아버지는 그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고는 3주간도 살수 있지 않느냐? 우리가 전에 수용소에서 사흘 동안 물을 안 주어서 목말라 고통을 당했지만 그래도 물을 안 마시고는 사흘 동안 살 수 있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한 시간도 살 수 없지 않느냐? 내가 이 버터에 불을 붙인 것은 우리가 이 절망적인 수용소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질그릇 가운데 희망의 불꽃으로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놀라운 말입니다. 고난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가슴속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괴로움에도 헤쳐나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희망을 잃어버린 개인과 백성은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절망과 그 절망 안에 심겨진 부활의 소망은 우리에게 영원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다 버리시고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하나님조차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절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 가운데도 예수님은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부활한다는 희망을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큰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이 그 절망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속에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를 극복하고 영원한 희망의 불길이 되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항상 절망의 칠흑 같은 상황 속에서 소망의 빛이 심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위대한 것은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도 부활의 희망이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괴로운 십자가가 다가 오더라도 그 안에 이미 부활의 씨앗은 심어져 있으니 반드시 그 씨앗은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곧 부활로 새 출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혹독한 겨울의 추위 속에서라도 이미 봄의 희망은 심어져 있습니다. 아무리 눈보라 치고 설한 북풍이 치고 온천지가 얼어붙고 다시는 희망이 없는 것 같을지라도 그 겨울의 한복판에 봄의 희망은 이미 심어져 있습니다. 때가 이르면 씨앗은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어느 때나 절망할 수 없습니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 안에서는 부활의 씨앗이 심어져 있습니다. 희망의 씨앗이 이미 심어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20세기 위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15살이 되던 해에 동경으로 올라와 낮에는 인쇄소 청소부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노동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렇게 미래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던 그는 21세라는 젊은 나이에 절망적인 벽에 부딪혔습니다. 시름시름 앓던 폐병이 악화되어 크게 피를 토하고 의사에게 진단을 받았더니 이제는 소생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이상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 폐병을 가슴에 안고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픈 침상에 드러누워서 이제는 살 희망이 없으니 신세 지는 것보다는 자살해야 되겠다고 곰곰이 생각했으나 하나님 말씀이 기억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배반당하고 혹독한 고난 당할 때 자살할 생각을 했더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면서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셨지 자살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지 좌절과 절망에 처했을 때 자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예수를 모셨으니 내 이 폐병 말기에 가장 절망 속에서도 부활의 희망이 있지 않느냐.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슴속에 품고 있으니 절망을 바라보지 말고 부활을 바라보고 새 출발을 하자고 생각한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리어커에 자기의 짐을 다 주섬주섬 실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니가와의 빈민굴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평생을 창녀와 술주정뱅이들과 전과자들을 돌보며 자신이 깨달았던 희망에 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절망적인 빈민촌에 창녀로서 술주정뱅이로 도박꾼으로 있지만 절망 중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를 모시면 절망 가운데서 희망이 싹틉니다. 희망이 꽃이 핍니다. 희망이 열매 맺고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희망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절망에서 희망을 붙잡고 희망의 복음을 전하자 희망이 그 폐병을 이겨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폐병을 극복하고 그는 오래 장수하면서 위대한 위인으로서 일본의 빈민굴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꽃을 피웠던 사람이었습니다.
빈민굴에 들어가기 전 가가와 선생이 기록했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나 가가와 도요히코는 방금 죽었다. 이제부터 나는 새롭게 사는 것이다. 죽음의 선을 건너서 영원한 부활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칠흙 같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절망을 되씹고 살지 않고 소망을 가슴속에 품고 나가면 소망은 내일의 위대한 희망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좌절과 절망적인 환경에 처했지만 하나님은 두 번 꿈을 통해서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어떠한 일이 다가와도 너에게는 이 희망이 싹트는 날이 다가온다. 그래서 그는 희망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2. 요셉의 고난 속에 동행하신 하나님
둘째로, 우리가 요셉의 생애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요셉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안보이게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고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주님은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입니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가 애굽에 내려가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그 당시에 종은 인권이 없었습니다. 짐승과 같았습니다. 짐승과 같은 우리에서 잠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하나님은 요셉과 같이 계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못 보았으나 하나님은 요셉과 같이 계셔서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종으로서 하는 일마다 잘되니까 보디발이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 요셉을 그냥 애굽에 와서 출세하지 않고 그런 고난을 겪게 했습니까?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을 떠 와서 그대로 토기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진흙을 잔잔하게 부수고 짓이겨서 부들부들하게 만들어, 그래서 들고 농노에 앉아서 그릇을 만들 수 있지요. 흙덩어리 그대로는 안 됩니다. 뭉쳐진 그대로는 안 됩니다. 부서야 되는 것입니다. 아주 부들부들해서 찰떡같이 되어야 손에서 그릇을 만듭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댁에서 종살이 10년, 감옥살이 3년 13년의 세월 동안 부서지게 하고 짓밟고 찰떡같이 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사용하는 귀한 그릇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64장 8절에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셉을 깨뜨리게 하시고 짓밟아서 그로 하여금 완전히 짓이겨져서 하나님 손에서 애굽의 국무총리라는 위대한 그릇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입니다. 모든 고난의 과정 속에는 언제나 희망의 씨앗이 심겨져 있습니다. 요셉의 억센 고난의 과정 속에서도 이미 고난 당하기 전에 하나님은 두 번 꿈을 통해서 희망의 씨앗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여러분의 삶의 모든 고난의 과정 속에 이미 부활의 씨앗이 심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역경은 극복되고 희망의 씨앗은 싹트고 꽃피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냐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어제에 대한 죽음이면 희망은 내일에 대한 새 출발인 것입니다.
요셉은 계속 고난을 당했지만 계속 고난 속에서 그는 또 깨어지고 짓이겨지고 하나님 손에서 더 아름답고 새로운 그릇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요셉은 가정 총무가 되어 평안하다고 생각할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마음속으로 연애했습니다. 요셉과 같이 있기를 간청했으나 요셉이 절대로 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낮에 종들은 다 밭에 일을 하러 가고 요셉은 볼일이 있어 대청마루에 들어갔다가 보디발의 아내에게 잡혔습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보디발의 아내가 잠옷 바람으로 나와서 보다가 자기가 흠모하는 요셉이 와있는 것을 보자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동침하자.” 요셉이 “나는 이런 큰 죄를 지을 수 없다.” 절대로 안 된다고 뿌리치고 나오니 그 여인이 요셉의 옷을 붙잡았으므로 옷이 벗겨졌습니다. 웃옷을 벗겨 놓고 요셉이 도망쳤습니다. 이 여인이 그 옷을 손에 들고 고함고함 치고 발을 구르고 “내가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했다. 요셉이 나를 강간하러 왔다가 내가 고함을 치니 도망을 쳤다.” 이제 요셉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피합니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일방적으로 고함을 치고 몸부림을 치니 그 여자의 말을 믿어주지 누가 요셉의 말을 믿어줍니까? 요셉은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 종들이 다 모이고 일꾼들이 다 모여오고 그 말을 들은 보디발이 바로의 왕궁에서 뛰어 왔습니다. 얼마나 요셉을 때리고 짓밟았겠습니까? 그 당시에 종은 인권이 없기 때문에 짐승과 같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강간한 사람은 언제나 즉결처분했습니다. 요셉은 앞이 캄캄했습니다. 자기는 별도리 없이 변명 한마디 못하고 즉결처분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그는 꿈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즉결처분당하면 형들이 내게 와서 절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느냐? 하나님이 내게 희망을 심어 주었으니 이 어둡고 캄캄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아무도 도울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꿈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이 희한하게도 요셉을 즉결처분하지 않고 정치범 수용소인 시위대 뜰 감방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위대 뜰 감방에 들어간 그 상황 속에서도 성경은 하나님은 요셉이 같이 하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못 보아도 하나님은 감방 속에서도 요셉과 같이 했습니다.
창세기 39장 21절로 2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우물물에 빠져도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고 종으로 잡혀가도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억울한 누명을 덮어쓰고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하나님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어느 곳에나 같이 계시고 하나님은 요셉을 성공하게 하고 승리하게 하고 번창하게 했습니다. 어떠한 환경과 운명에 처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이요, 승리요, 축복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롭게 내버려 놓지 않습니다.
신명기 31장 8절에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예레미야 애가 3장 31절로 33절에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희망과 꿈을 가슴에 품고 그를 버리지 아니하면 반드시 그 희망의 씨앗은 싹틉니다.
성도 여러분! 한겨울 한가운데도 봄의 씨앗은 우주 속에 심어져 있고 그것은 결국 싹터서 봄을 가져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죽음에 극복을 하고 부활의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셨으면 우리는 희망의 씨앗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씨앗은 어떠한 환경에도 싹이 틉니다.
영국의 탐험가들이 이집트에 가서 피라미드 속에서 꽃씨를 발견했습니다. 3천 년 되는 꽃씨입니다. 3천 년이나 지났으니 생명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씨앗을 영국으로 가져와서 잘 가꾸었더니 그것이 싹이 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웠는데 도저히 무슨 꽃인지 몰라서 탐험대 대장의 이름을 따서 ‘다알리아’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알리아꽃입니다.
3천 년 된 마르고 마른 씨앗도 그 속에 생명이 있어서 나중에 때가 오니 꽃이 피어나는데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씨앗으로 가슴속에 모시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역경에도 우리가 참고 견디면 꽃피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승리의 꽃을 피우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바로 요셉이 체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는데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감옥에 누가 들어왔느냐. 떡장관과 술장관이 왕의 뜻을 거역하다가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같은 날 밤에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꿈을 해석하지 못해서 괴로워할 때 요셉이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꿈 그대로 바로의 생일날에 떡장관은 처형을 당하고 술장관은 복권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꿈을 해석해준 그대로입니다. 술장관은 굉장히 고맙다고 하였고 요셉은 술장관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나가면 왕에게 이야기해서 나를 좀 감옥에서 나가게 해주십시오. 나는 죄지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가고 난 다음에 술장관은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그 이후에도 2년 동안 감옥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희망의 씨앗이 싹틀 때가 왔습니다.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두 번 연속하여 꿈을 꾸었는데 너무 번뇌스럽습니다. 그 꿈을 능히 해석할 사람이 없습니다. 나일강에서 아주 살찐소 일곱 마리가 와서 풀을 뜯어 먹는데 뒤에는 흉악하게 마른 소가 다시 와서 살찐소를 다 잡아먹고도 아주 흉악하게 말라 있었습니다. 깨어났다가 또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니 아주 아름다운 살찐 이삭 일곱 개가 나왔습니다. 그다음에는 세약하고 동풍에 메마른 이삭이 나와서 이 일곱 이삭들이 살찐 이삭들을 다 삼키고도 세약하게 남았습니다.
이 꿈을 해석해 달라고 애굽의 모든 술사들과 박사들을 다 불러도 아무도 해석을 못하여서, 그 때에 술장관이 무릎을 탁치면서 “왕이여 내가 왕의 뜻을 거역해서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 꿈을 꾸었는데 떡장관과 술장관인 내가 똑같은 날에 꿈을 꾸었으나 몽조가 다르던데 꿈을 해석 못하여 고민할 때 요셉이라는 히브리 청년이 같은 감방에 있으면서 우리 꿈을 해석했는데 꿈 그대로 떡장관은 처형되고 나는 다시 등용이 되었습니다. 요셉을 부르심이 어떻습니까?” 왕이 “당장 요셉을 불러라!” 하루는 감옥에 있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요란한 수레 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감옥 문이 열리고 이발사가 들어와서 요셉의 수염을 깎고 이발을 시키고 그 다음에는 목욕을 시키고 비단옷을 입히고 수레에 태워서 달려가는데 어디로 가느냐하면 바로 궁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41장 14절로 16절에 보면 “이에 바로가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낸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오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꿈,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요셉의 꿈이 이제는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피고 열매 맺을 때가 온 것입니다. 꿈을 품으면 반드시 좋은 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꿈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품고 있으면 꿈이 여러분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버리는 사람은 꿈을 빼앗아 버립니다. 하나님이 버리는 민족에게는 꿈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는 사람에게는 꿈을 심어 줍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는 민족에게는 꿈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려 6백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비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잃었던 옛 땅을 되찾고 세계 열방과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고 있습니다. 그토록 처참하게 파멸되었던 유대민족이 어떻게 재기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도 야웨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일례로 어느 유대인 강제 수용소 벽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믿노라. 해가 비치지 않더라도 구름 위에 해가 있다는 것을. 나는 믿노라. 사랑을 느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믿노라. 하나님께서 침묵하실지라도 여전히 침묵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 글은 누군가 사형을 당하기 직전 절대 절망의 순간에 새겨놓은 글입니다. 그들은 소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처절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결국 이런 소망이 오늘날 유대인들을 재기시켜 이스라엘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리는 민족과 개인에게는 꿈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절망을 극복하고 살 수 있는 유일한 힘을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소망되시는 야웨 하나님을 의지하고 꿈을 가질 때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좌절하고 절망하면 하나님이 나를 떠날 것 같지만 요셉을 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른 우물 속에도 하나님이 같이 계셨고 10년 종살이 할 때도 하나님이 같이 하셔서 하는 일을 형통케 하셨고 보디발의 부인에게 배척을 당해서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하나님이 같이 계셨고 바로 왕 앞에 섰을 때도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너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것은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직업군인이고 부인은 전화상담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눈이 시름시름 아프고 침침해서 병원에 가서 보니까 각막염으로써 빨리 수술하지 아니하면 실명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부인을 데리고 가서 눈 수술을 하고 일주일 후에 붕대를 풀었는데 그만 수술이 잘못되어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눈을 보다가 못 볼 때 얼마나 답답하고 절망적입니까? 부인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재기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직장에 나가게 되었는데 전화 상담원이니까 눈은 안 보여도 전화는 들을 수 있으므로 역시 계속해서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퇴근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행히 집 앞에 버스가 직장 바로 앞까지 가는 것이 있어서 남편이 계속해서 부인이 익숙할 때까지 손을 잡고 버스에 태워주고 같이 직장에 내려서 인도해 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부인이 익숙해지자 이제 부인은 혼자서 아침에 버스를 타고 직장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곤 했는데 한 6개월 후에 그 자매님은 그날 출근하기 위해서 버스 기사 바로 뒷자석에 있는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 기사가 뒤를 돌아보면서 “참 부인은 행복한 사람이네요.” 그렇게 말을 해요. 그 부인이 웃으면서 “앞도 못 보는 제가 뭐가 행복하겠어요?”
그러자 기사가 “매일 아침 부인을 지켜보는 사람이 늘 있잖아요.”
“네? 무슨 말씀이에요. 누가 나를 지켜 본 다구요?”
“부인 모르셨습니까? 남편께서 매일같이 부인과 함께 버스를 타고 부인이 앞좌석에 앉는데 남편은 몰래 뒷좌석에 앉아서 늘 부인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부인이 편안하게 내려서 직장에 들어가는 데까지 뒤따라가 보고는 돌아와서 버스를 타고 자기 길로 갑디다.” 그 부인은 몰랐습니다. 6개월 동안이나 매일같이 남편이 함께 버스를 타고 뒷좌석에 앉아서 자기를 돌보아 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장님처럼 못 봐서 그렇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항상 주님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성경에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같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눈동자를 누가 보호합니까? 눈꺼풀이 보호합니다. 평소에 늘 깜박거리며 눈을 씻어주고 보호해주는 눈꺼풀이 있다는 것을 기억 못 합니다. 그러나 우리 눈꺼풀이 왜 있는지 아십니까? 바람이 불 때, 먼지가 날아들어 올 때, 연기가 날 때는 눈을 깜박깜박하면 ‘아~ 눈꺼풀이 있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눈동자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꺼풀이 우리 위에 있는 것처럼 같이 계신 것입니다. 평소에는 몰라도 고난 당할 때는 하나님이 눈동자같이 우리를 덮어 주는 것을 우리가 체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법학자, 철학자인 힐티는 말하기를 “대게 행복한 때보다 고난의 때에 하나님은 더 가까이 계신다.”고 말을 했습니다.


3. 요셉에게 베푸신 잔이 넘치는 삶
셋째로, 결국에 꿈은 이루어지고 희망의 씨앗은 싹이 틉니다.
요셉에게도 잔이 넘치는 삶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고난의 텃밭에 심어놓은 희망의 씨는 반드시 싹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의 삶이 고난의 텃밭이라도 그 속에 예수님을 심어놓으면 싹이 납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심어놓았으니 싹이 날 것도 없지만 예수를 심어놓은 사람은 부활이요, 생명인 그리스도가 반드시 여러분 생애 속에서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는데 바로 요셉에게 그런 것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형들이 보는 앞에서 보디발이 보는 앞에서 그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 애굽의 당당한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들 앞에서와 보디발과 그 아내 앞에서 진수성찬이 차려진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고 문제해결 방식까지 말해주었습니다. 7년 풍년 동안에 그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서 각 전국에 도마다 곡식 창고를 짓고 그 곡식을 저장해 놓았다가 7년 흉년 때 그 곡식을 풀어 놓으면 모든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다고 방법까지 말해주니까 바로 왕이 아주 많이 감탄을 했습니다.
창세기 41장 40절로 43절에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사람 팔자가 시간문제입니다. 그늘에도 볕들 날이 있고 음지가 양지 될 날이 있습니다. 순식간에 요셉은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때가 오매 희망의 씨앗은 꽃을 피웠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을 지나고 비바람을 지났어도 그 소망이 요셉의 가슴속에 심겨져 있고 요셉이 소망을 버리지 않으니 나중에는 그 씨앗이 싹이 터서 애굽 국무총리라는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41장 38절로 39절에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10년 동안 종살이하고 깨어지고 짓이겨지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바로조차 감탄할 수 있는 지혜롭고 명철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요셉 스스로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고 짓이겨졌지만, 토기장이인 하나님이 그 부드러운 진흙이 된 요셉을 지혜 있고 총명한 그릇으로 만들어서 바로 왕조차 감탄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결국에는 총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나머지 삶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하고 말한 것처럼 잔이 넘칩니다. 요셉의 잔이 넘쳐서 수많은 사람을 살렸습니다. 온 애굽 전 국민을 살리고 온 중동을 살렸습니다. 그 형들이 못 먹고 살 때 형들과 70인의 가족들을 모두 애굽의 고센땅에 불러다가 요셉이 공개했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이 모였습니다. “야~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우리에게 복수할 날이 왔다.” 그들이 요셉을 팔았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요셉을 팔고 난 다음 죄책으로 그들은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살아 있으니까 아버지를 존경하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벌하지 못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뜨니까 “이제는 우리는 낭패다. 요셉이 우리에게 복수할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50장 15절로 17절에 보면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거짓말입니다. 살아나려고 그렇게 거짓을 말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당신들 너무나 해도 너무했지 않소? 이제 나도 당신들에게 복수하겠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요셉은 얼마나 깨어지고 하나님 사람이 되었든지 형들이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 말을 듣자 울었습니다. 마음이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요셉이 된 것입니다. 형들의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19절로 21절에 보면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그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붙들어서 그 형들의 모함을 오히려 선으로 바꾸어서 오늘날같이 성공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속에 꿈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하리라. 꿈이 없었으면 요셉은 망했을 것입니다. 정신이상자가 되었든지 자살했든지 파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흑암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도 요셉은 하나님이 심어준 꿈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비바람을 건너서 흑암을 뛰어넘어 그 꿈의 씨앗이 잎이 나고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항상 십자가와 부활의 연속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있으면 그다음에는 부활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다른 신앙에는 이런 것이 없어요. 인간의 수양과 도덕으로 장차 좋은 낙원에 갈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었지 죽음의 다음에 부활이 있는 가르침은 예수님 생애 속에 기독교 복음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따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사망이 항상 다가오나 언제나 부활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과 부활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사망 속에 심어 놓았지만 부활의 씨앗이 되어서 곧장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빛으로, 무질서는 질서로, 절망은 소망으로, 죽음은 삶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의 씨앗이 되어서 심어 있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와 영광과 평안의 씨앗이요,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씨앗이요, 치료와 건강의 씨앗이요, 축복과 형통의 씨앗이요,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으면 캄캄한 가운데 그 가운데 이 씨앗이 싹이 돋을 날을 기다리고 있고 반드시 참고 견디면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피고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크고 작은 고난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으면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새로운 희망의 솟아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모든 고난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란 희망의 씨앗을 이미 품고 있습니다. 어떠한 고난도 이 희망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절망도 그 속에 있는 희망을 짓밟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꽁꽁 얼어붙은 땅도 연약한 싹이 뚫고 올라옵니다. 연약한 싹이 바위도 뚫고 올라옵니다. 사망이 아무리 우리를 둘러 진 치고, 좌절과 절망이 아무리 우리를 둘러 진 치고, 설한북풍이 불고 꽁꽁 우리 인생이 얼어붙어도 우리 속에 예수님이 계시면 희망이 싹이 돋아 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속에 희망의 삶이 들어있고 생명력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로 여러분의 생애 속에 반드시 싹트고 잎이 피고 꽃피고 열매 맺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할 수 없습니다. 결코, 절망할 수 없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뒤로 물러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예수를 모셨으므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의 씨앗이 되어서 우리는 끝없는 희망의 자녀가 되지 절망의 자녀는 될 수가 없습니다.
고난과 소망에 대한 명언이 있습니다. 루씨 렝켈이라는 사람은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림자는 가까운 곳에 빛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시인 존 그린 휘터는 말하기를 “구름 뒤에는 별빛이 숨어있고 소나기를 뚫고서 햇살이 비춰오니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위하여 소망을 남겨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윤리학자인 장켈 래비치는 “희망은 절망의 나락에 빠진 잿더미에서도 지치지 않고 되살아난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폭풍이 지나간 들에도 꽃은 피고 지진이 무너진 땅에도 맑은 샘이 솟아나며 초토 속에서도 새싹은 돋는다. 밤이 길어도 아침에 동산을 빛내는 빛이 비취고 오늘이 고달파도 보람찬 내일이 다가온다.”고 말했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의 씨앗으로 심고 있는 이상 넉넉히 이기는 그날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절망의 죽음을 헤치고 희망의 부활을 가져오신 예수님은 영원한 희망의 씨앗이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요셉이 그 절망 중에도 그 가슴속에 심어준 희망의 씨앗을 부여잡고 있을 때 절망의 땅을 뚫고 희망의 꽃을 피운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모시고 희망을 바라보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환경을 바라보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부정적이 되지 말고 우리 속에 희망의 씨앗인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꿈을 갖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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