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된 해방'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인 1945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구 일본 제국주의의 36년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해방된 영광스런 날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36년 동안 우리 민족은 숨조차 크게 못 쉬고 무자비한 수탈과 압박 속에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 왔습니다. 종국에는 우리의 말도 못하고 못 쓰게 되고 우리 성씨조차 강제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저의 이름은 조용기가 아니었습니다. 요시다 요오끼였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바꾸지 않고서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이 구 일본 제국주의는 그 말기에 이르자 완전히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 청년들은 모두 잡히어 전장으로, 장년들은 강제 노동으로 끌고 가고 아리따운 처녀들은 정신대라는 미명 하에 일본군 위안부, 즉 창녀로 전락시켰습니다. 전쟁이 가져온 상처는 우리 역사 가운데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곳을 새겨 놓았습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은 이를 체험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역사의 페이지에서 글로서만 읽고는 절대 그 상황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발의 원자탄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무조건적으로 항복하자 고대하고 고대하던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감격스러운 날로부터 이미 40여 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때 이후 분단된 조국은 지금도 쓰라린 상처를 안고 피를 흘리고 잇습니다. 이북에서는 한 사람이 40년이 넘도록 비정한 억압과 숙청과 독재를 하고 나더니 2만여 개의 우상을 세워 놓고 전 국민으로 하여금 그 곳에 절하게 하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 있습니다. 일본 식민지의 망령은 공산주의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노예 제도의 옷을 입고 북한 동포 2천만을 밟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수많은 정치적 시행착오 속에서도 새로 태어난 자유와 민족의 성장을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정치적인 제도적 자유와 민주와 해방이 필요한 만큼 영적인 자유와 해방은 더욱더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정치적 제도와 민주와 자유는 우리가 사는 동안 누리는 것이지만 영적 자유와 해방은 영원히 누릴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이 자유와 해방을 주셔서 무한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증거의 시초에 당신께서 자라신 나사렛 땅에 오셔서 회당에서 장엄한 복음 선언을 하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복음 선언을 들어 보십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 나사렛의 회당에서 선언하신 복음은 오늘 여러분과 저의 생활에도 조금도 변치 않고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 나셔서 모인 군중들 앞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내가 온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 고 하셨습니다. 가나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3대 가난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죄악으로 인한 의의 가난 속에 태어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배속에서 죄악으로 잉태되고 죄 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생각은 악합니다. 사람은 이 죄악에서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죄악의 포로가 되어 살고 죄악의 고통 속에서 의의 가난을 체험하고 삽니다.
또한 사람들은 무의미로 인한 삶의 의미의 가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것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문득 허리를 펴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하며 생각해 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일생을 살면서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 궁극적인 관심사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흙에서 태어나서 흙만 파다가 세상을 떠나는 인간의 허무에 큰 비애를 느끼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의미로 인한 삶의 의미의 가난을 사람들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죽음으로 인한 생명의 가난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이 세상에 부모, 형제, 처자를 거느리고 살더라도 죽음이란 우리를 이러한 것들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어린 아이로서도 죽고 젊은 때도 죽고 장년에도 죽고 늙어서는 아무도 피하지 못하고 다 죽습니다. 죽음이란 무자비하게 우리에게 엄습해 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그 모든 모습은 사라지고 불러도 울부짖어도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인간은 죽음으로 인한 생명의 가난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가난을 철폐하고 주님께서 진실한 부요를 가져다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육신을 쓰시고 세상에 오셔서 인간으로 사시고 인간을 대표하사 십자가에 자원하사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책임지시고 인간의 모든 버림받은 상태를 책임지시고 죽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를 흘려서 생명을 쏟아 우리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악은 다 청산되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얻은 원죄까지 예수님께서 그 몸으로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찢으시고 흘리신 그 몸과 피를 통해서 청산한 죄는 이제 예수를 믿고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효과를 발합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받아 마땅한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쫓아 나와 회개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는 그 순간에 사람들은 모두 죄에서 용서를 받고 의로써 축복을 받아 의의 풍부와 부요 속에 들어오게 되고 죄인이 용서를 받아 의로운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아버지의 친자녀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고 성령을 우리에게 부오 주셔서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이제 허무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참된 가치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 받고 예배드리며 산다는 가치 이외에 더 큰 가치가 없고 이 의미 외에 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발견하고 난 후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비로소 허무로 인한 삶의 의미의 가난에서 벗어나서 의미가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장사지내고 부활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에 참예 하게된 것입니다.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죽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정복되어 버리고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새 생명을 얻어 영광스런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부유한 삶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우리의 내적 세계의 가난을 철폐하고 부요로 채워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서 우리가 행인과 나그네의 길을 걸어가는 이 삶 동안에도 육신의 삶의 가난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성경 고린도후서8장 9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저가 부유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저희 가난하심으로 인하여 너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를 인하여 우리는 가난으로부터 해방을 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이는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 안에서 저주의 누더기는 다 벗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물질적인 가난과 저주에서도 해방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언약과 그리스도의 복을 허락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영적인 가난과 현실적인 삶의 가난과 저주에서 해방 시켜 주시는 해방 자요,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앞에 나올 때 가난은 영육 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무지의 포로로 태어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이미 영적으로 죽어 태어나므로 영의 세계를 모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물질적인 세계밖에 모릅니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는 완전히 죽어 아무 교통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칭찬해서 대답하지 않고 욕을 해도 분노하지 않고 반응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영적인 천국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고 거기에 대해 죽은, 상관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완전히 무지에 포로 된 자는 자연적으로 유물론자가 됩니다. 사람은 물질에서 태어나서 물질로 살다가 물질이 사라지면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다윈의 진화론에서 말한 것처럼 무기물에서 조그마한 아메바가 태어나 이것이 진화하여 원숭이가 되고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지인 것입니다. 유물론자, 진화론자는 자동적으로 인본주의자가 됩니다. 인생에는 사람밖에 없으므로 인간 중심으로 이 우주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지의 포로 된 자가 예수를 구주로 모시자마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알게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인의 죄를 사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이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뚜렷이 보여주시고,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이 천지간에 계신 것을 우리에게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예수를 통해서 알게되자 우리는 무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유물론과 진화론, 인본주의에서 해방되어 살아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마귀와 죄의 포로 된 자로부터 예수님으로 인해 해방됩니다. 마귀의 권세는 십자가에서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정사와 권세를 밝히 벗어 버려 마귀의 무장을 해제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와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마귀의 권세를 내 쫓을 수 있고 해방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죄악의 악한 습관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놓여납니다. 알콜 중독자, 약물 중독자, 음란하고 방탕한 자, 세상의 모든 죄악에 묶인 자들이 나사렛 예수께 나아오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해결해 주시고 자유를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 속에 끊임없이 염려와 근심, 불안과 초조를 가지고 절망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을 통해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쉬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매일같이 여러분의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십니다. 이러므로 예수님께 나아와 여러분의 짐을 맡겨버리면 우리 주님께서는 그 짐을 맡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도록 해 주시십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포로된 자리에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고통 가운데 있지만 주님께 나오면 지적으로 자유를 얻게 되고 마귀와 죄의 포로 된 자리에서 해방을 얻고 염려와 불안, 근심, 초조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진실로 여러분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 주님은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눈이 안 보이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더구나 산천 초목이 푸르고 아름다운 계절에 푸른 하늘과 들판, 이 싱그러운 산천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인지 모릅니다. 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눈을 주신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 일이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눈을 잃어버리고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플까요? 육신의 눈을 잃어도 슬픈데 영적인 눈을 잃어서 천국과 영적인 세계를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늘 땅만 바라보고 살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이것 보다 더 비극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음만 못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육신 속에 살고 있는데 육신의 장막이 벗어진다고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속 사람이 눈을 떠서 천국을 바라본 사람은 영생을 얻고 천국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은 무지한 가운데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영안이 밝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며 손을 잡고 거닐며 극진한 사랑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 하여 그의 영이 죽어버리자 영의 눈도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인류는 눈이 어두운 채로 태어났습니다. 영적인 장님으로 태어나서 이 썩어질 물질과 세상만 바라보지 영적인 세계는 바라보지 않고 또 바라보려 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본다는 것은 깨닫는 것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은 영을 살려 주시고 우리의 영안을 밝혀 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영생을 얻고 영적으로 눈이 밝아져 하나님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이 구주 되심과 성령이 함께 계심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됨과 이 세상이 마지막에는 멸망 받고 지옥으로 떨어지지만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지 않은 자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사람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존귀해도 깨닫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 밝히 보이는 대도 이를 저버리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 자랑만 따라 살다가 멸망하면 짐승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 오셔서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시고 영적 세계를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육신의 세계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것을 바라보고 영의 세계에 속한 사람은 신령한 영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 성경을 바라보고 그 가운데에서 인생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영의 뜨이고 나면 지금이 세상의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 뿐 아니라 환경과 역사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때가 마지막 때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눈을 떠 영안을 볼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예수님께 나오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주님께서는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 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눌리고 산다는 느낌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습니다. 일정 36년 동안 일본인에게 눌려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살았습니다. 또, 6.25 사변동안 공산주의자들에게 짓눌려 당한 고통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정치적, 환경적으로 눌리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인 스트레스에 눌려있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 몰인정하고 급격한 사회적 변화로 인해 사람들은 마음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마음에 스트레스를 얻어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초조하고, 더 나아가 정신병과 신경쇠약에 걸립니다. 심리적인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마귀는 우리의 육체를 눌러 병들게 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권능을 기름 붓듯 하였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며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라 하셨습니다.
우리 병의 70%에서 100%에 이르기까지는 마귀가 가져다 줍니다. 마귀가 억눌러 폐병 들고 암, 심장병이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우리에게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네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눌려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적으로 스트레스를 가하고 육적으로 눌러 우리를 병들게 하는 원수 마귀를 우리는 쫓아내고 눌린 곳에서 자유를 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마귀에게 눌려 있으면서도 놓여남을 받지 못합니다. 육체가 눌려 병들어 있고 가정이 눌려 곤란 가운데 있으면서도 해방과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자유케 하는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속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셨습니다. "의인은 저를 이기었나니 이는 저희 안에 계시는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니라"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시고 우리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셨으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우리를 피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귀신을 쫓아냄으로 우리의 환경 가운데 눌린 자가 자유를 얻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하여 참된 의를 누리고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마귀가 오면 불안하게 하고 기쁨을 빼앗고 범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알고 끊임없이 주를 의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내어쫓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가 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마귀에게 눌려 심적으로 우울하고 절망적이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생활이 혼돈과 고통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교인들이 모두 믿음으로 무장하고 단호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했다면 수많은 억압에서 해방을 얻고 큰 기쁨 속에서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 말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고 귀 있는 자들은 듣고 믿음으로 단호하게 서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섯째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시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은혜의 해가 전파되었습니다. 성경은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하셨으며 "은혜 베풀 때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율법의 시대로서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 율법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 이후로는 예수님께서 은혜의 시대를 공표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시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해가 전파되고 잇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못나고 버림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넝마와 같은 인생을 향해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지금보다 더 좋은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은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모두 주님 앞에 나와 예수를 믿으므로 값없이 죄를 청산 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은혜와 구원의 때에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좋은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오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배반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비극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때는 사라지고 구원의 때는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벌써 은혜와 구원의 때가 지나가는 황혼의 때가 보입니다. 주께서 하늘에서 강림하시는 그 날에 은혜의 해는 끝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과 하나님의 나팔을 쫓아 친히 강림하실 그때,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살아남은 우리들이 변화 받을 때 은혜의 시대는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환란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과로 말미암아 고난과 슬픔과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 날에는 엄동설한같이 얼어붙은 땅에서 아무리 울부짖어도 구원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은혜의 때를 전하기 위함" 이라 하셨으니 이 은혜의 때가 지나기 전에 모두 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으로 모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 정치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필요한 것이 자유와 민주주의인 것입니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잇는 곳에만이 인권이 존재합니다. 인권이 유린된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도 자유도 민주도 독재의 구호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적인 해방과 자유가 없이는 마귀의 영적인 독재와 군림 속에서 결코 우리는 평안과 기쁨을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잠시 잠깐 동안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삽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사는 저 내일에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와 평안과 영광이 필요합니다. 지금 사는 것은 잠시 잠깐이요, 장차 우리가 살 곳은 영원한 곳입니다. 잠시동안 내 마음대로 육체를 따라 살고 영원의 세계를 포기해 버리고 영원의 세계동안 마귀와 함께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 가운데 있기를 자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겠다고 하셨으므로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사람마다 진실한 자유와 해방,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보다 더 영광스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이 영광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사람이 이 영광을 누립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중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믿다가 타락 한 사람을 모두 다 불러 주시기를 간구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예' 하고 나와서 구원을 받고 이 영광에 참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자유를 잃고 속박 속에 산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입니다. 하물며 저 영원한 미래의 삶에 자유, 기쁨, 평안, 의를 다 잃고 영원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지옥에서 고함치며 지낸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은 쉽게 방만하게 생각할 일이 아닌 중대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중요한 일을 무시하고 일시적으로 있다가 사라질 것을 중대한 사건으로 받아들여 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애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하나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자기 목숨과 무엇을 바꾸겠느냐"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버지여,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하였사오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