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중략)…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4장 1∼11절
인간의 안식과 달리 하나님의 안식은 완전함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 걸려
예수의 십자가 우리를 새 안식으로 초대
안식이란 문자 그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고 편히 쉬는 것입니다. 인간의 안식이란 할 일이 아직 태산 같이 많아도 잠시 시간을 내어 휴식하는 것을 안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안식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다 완성해 놓으시고 다시 해야 할 일이 없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안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안식에 참여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안식
일단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면 마음에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다 사라지고 완전한 평화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를 지으시고 제 칠 일에 안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지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로부터 천지만물을 다 지으시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으시니 제 칠 일에 안식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절로 3절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고 기록합니다.
이전 엿새 동안에는 축복한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지만,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복되게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보장이 돼 있는 것입니다. 축복받은 날을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며 지낸다는 것은 그 한주 동안 하나님의 축복이 따를 것을 보장합니다. 그러므로 주일마다 우리는 입을 넓게 열고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안식’이 왜 필요할까요? 스위스의 해글러 박사는 산소량에 대한 실험을 통해, 안식일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날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밤에 휴식을 취하면서 얻는 산소의 양은 낮에 일하면서 잃는 산소의 양보다 적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안식하며 얻는 산소의 양이, 평일에 우리가 잃은 것을 보충하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 많은 양의 일을 해도 주일에 안식하면 충분히 보충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월요일에 다시 일하러 나가도 피곤치 않고 지치지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일의 효율도 떨어집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무신론 혁명 당시 주일 예배를 막기 위해 한 주를 10일 단위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산업의 생산량이 40%나 감소했고, 러시아 공산혁명 때는 한 주를 8일 단위로 하자 생산량이 30%나 감소했습니다. 그래서 6일로 줄여보았지만 역시 생산량이 30%로 감소되어 결국 다시 7일로 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없애버리면 일이 더 잘 될 줄 알았는데 정작 실제로는 사람들이 휴식이 충분치 않아 노동의 효율성이 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한 것을 사람이 바꿔 봤자 허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것은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일주일이 7일인 것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는 창세기의 안식일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다 이루시고 안식하시며 축복한 날인 것입니다. 그날을 인간의 힘으로 바꿔 놓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죄와 질병, 저주와 절망, 죽음, 미움, 분노, 질투, 시기 온갖 것이 다 넘쳐나고 골치가 아픕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하나님의 안식이 왜 깨어졌습니까?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안식일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로 17절에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선악과라는 것은 좋다 혹은 나쁘다를 결정하는 주권행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주권행사를 하려고 하다가 버림을 당하고 영적으로 사망하고 에덴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지으신 안식이 파괴됐습니다.
이와 같이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타락하므로 쓸데없는 일들이 세상 속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와 악, 부패, 부정, 병, 저주, 죽음, 지옥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 인간은 절망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인간의 불안을 세 가지로 설명했는데 첫째, 존재의 불안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거대한 세상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불안한 가운데 인생길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양심의 불안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완전 범죄를 해도 마음속에 양심의 불안은 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의 죄지은 것을 모르고 있어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양식의 가책과 죄책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갖고 자유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서 하나님과 함께 행복했고, 불안과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존재의 불안도 없었습니다. 양심의 불안도 없고 죽음에 대한 불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이 불안 가운데 있게 된 것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불신앙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려 스스로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아담은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안식을 깨뜨렸습니다. 그러므로 죄지은 인간은 불안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서 2장 22절로 23절에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렇게 헛된 세상에 살게 된 것은 우리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안식은 영원히 찾지 못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2. 새로운 안식
첫째 아담은 안식을 잃어버리고 우리를 형편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둘째 아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과 함께 살면서 아담 이후에 나타난 쓸데없는 일들을 전부 청산하기 위해서 짐을 짊어진 것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의식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죽었다가 부활하신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 인류의 전체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대신 짊어진다는 것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 8절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라고 기록합니다.
마땅히 형벌 받을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물과 피를 다 쏟고 난 다음 마지막 운명하기 전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죄악과 허물을 다 청산했고, 질병과 저주를 다 청산했다. 죽음까지도 다 청산했다” 그 말은 “너희는 이제부터 자유를 얻으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죄에서 놓여납니다. 허물에서 놓여납니다. 병에서 놓여납니다. 저주에서 놓여납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놓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이란 언제나 우리가 주님 앞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은 바로 안식 후, 첫날 바로 주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기록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도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주 첫날은 오늘날의 주일을 말하는데 우리 크리스천은 안식일을 주님 부활의 날로 지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하나님께서 토요일날 천지를 다 완성했기 때문에 그날을 안식일로 지켰지만, 첫째 아담의 죄악으로 안식이 다 깨어지고 엉망진창이 된 것을 둘째 아담 예수께서 오셔서 그 모든 것을 갚으시고 주일날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안식 후 첫날 곧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 아담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잃어버린 안식을 회복하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안식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안식’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대신 청산하고 우리가 자유와 해방을 얻는 기념일인 주일이 바로 새로운 안식일인 것입니다.
3. 새 안식으로 초대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짐을 짊어지시고 새로운 안식을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몸 찢기고 피 흘린 대가로 우리에게 거듭나는 중생의 복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복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치료의 복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축복의 복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재림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믿으면 요한삼서 1장 2절에 있는 것같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하시며 삼중축복, 곧 영혼육의 전인구원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영혼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고 예수님 믿고 은혜를 받으면 범사에 저주에서 해방돼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고 그 다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질병에서 놓여남을 받고 건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새 안식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주야로 깨닫고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지금 그리고 이 자리(Now and Here)’에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지나간 사건이 아니며 장차 미래에 다가올 사건도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고 구원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부여 의지없어서 주님 앞에 나갑니다”하고 십자가 밑에 나오면 이 자리에서 구원 받습니다. 이 자리에서 은혜 받고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의 안식은 내 것이다”를 입으로 끊임없이 시인해야 됩니다. 그렇게 믿고 고백하며 진실로 예수 믿고 십자가 밑에 들어가면 안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절대 믿음, 절대 순종을 통해서 안식을 얻습니다.
히브리서 3장 11절로 14절에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안식으로 들어오라고 청하고 계십니다. 그때 믿고 순종하여 들어가면 우리는 안식을 누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고 고통과 괴로움이 다가오는 것을 체험 안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개인에게도 사업에도 나라도 국가도 여러 가지 문제 있을지라도 그 문제 가운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걸머지고 서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 십자가에 들어가면 문제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주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에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찾아낸 안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놓은 안식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깨닫지 못하겠거든 성령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경은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성령은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서 와 계시므로 성령께서 부탁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로 10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짐을 짊어 질뿐 아니라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을 미리 아시고 필요한 것을 모두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필요가 없이 주님께 맡기고 있으면 필요할 때 필요한 그대로 꼭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주님이 미리 다 예비하시고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던 마귀는 지금도 우리를 유혹합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너희 짐을 짊어지지 않았다. 불순종해라. 교만해라. 오만해라. 탐심과 욕심을 가져라”고 말하면서 불신앙과 의심을 가져다주고 새로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자꾸 훼방합니다. 결국 마음에 고통을 당하게 하고 우리를 우울하고 침울하게 만들어, 나중에는 고통과 괴로움과 절망에 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안됩니다. 매일매일 항상 교만과 탐욕과 불순종과 불신앙을 회개하고 절대 순종, 절대 믿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받아가야 합니다. 지금 받아들이십시오. 지금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미 안식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참된 안식을 얻으면 얼굴에 화색이 돌고 기쁨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경험하는 가장 위대한 변화는 마음에 평안인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평안이 없습니다. 지위와 명예와 권세가 있으면 그에 따르는 염려와 근심이 더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주님께 내어맡기면 어떠한 곳에도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그 평안이 바로 행복인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만 있으면 사업을 해도 평안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를 해도 평안하고, 전쟁을 해도 평안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있어 평안을 주시고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 살지 않습니다. 우리 일생을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주님께서는 어느 곳에나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주를 의지하면 결코 실패하거나 낙심치 않고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오늘 주님 앞에 나왔는데 주님은 2천년 전에 우리의 짐을 주님의 멍에인 십자가에서 다 청산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은총과 사랑을 허락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춰 주셔서 참된 안식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 중 한 사람도 마음에 불안과 공포를 갖고 살지 말게 도와주시고 “네 짐을 야훼께 맡겨라 그리하면 너의 짐을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신대로 안식을 주기를 원합니다. 평안을 얻고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