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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주시는 해방

by 삶의언어 posted Aug 20, 2024 Views 5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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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이 주시는 해방"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과거 36년 간 일제치하에서 자유를 잃고 억압 하에 살아본 사람들은 해방이 가져다 준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것을 뼛속까지 깨닫고 알 것입니다. 해방 후 이북 공산 치하에서 무서운 속박을 경험한 사람들도 자유는 생명처럼 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창조주가 되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속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자유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 우리는 끝임 없는 영적인 속박과 정신적인 억압과 육체적인 고통과 사회제도적인 억압 가운데서 슬퍼하고 고통을 당하며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날 우리의 마음속에 갈급한 이 참 자유는 우리가 어디에서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 자유를 얻을 수 있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가셔서 40주 40야를 금식하시고 사탄의 시험을 받으사 이기시고 난 다음 그는 고향 땅 나사렛에 돌아가서 그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펼쳐서 주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생 증거 할 복음이 어떠한 내용인 것을 분명하게 그 자리에서 복음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선언을 가지고 참 자유가 무엇인지 여러분과 함께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은 우리를 속박하는 무서운 쇠사슬입니다. 사람들은 가난을 찬미하는 그러한 말도 하고 노래도 지은 사람이 있는데 실제로 여러분 가난한 생활 속에 들어가면 가난은 얼마나 우리를 파괴하는 무서운 쇠사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은 인간의 삶의 행복과 꿈을 산산이 찢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 전에 한 소녀의 눈물어린 편지를 받았었습니다. 목사님, 나는 목사님 교회에 나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까 목사님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해서 내가 감히 편지를 씁니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기르시는데 어머니의 몸도 편하지 않고 병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남매를 먹이고 공부시키기 위해서 어머니는 공사장에 가서 그 험한 노동을 합니다. 저녁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밤새도록 앓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아침에 한 술을 뜨시고 또 공사장으로 가는데 이제는 어머니가 허리를 다쳐서 종종 공사장에도 못 나갑니다. 우리 오빠는 중학교 2학년 다니다가 이제는 어머니가 공사장에 나가 돈을 벌지 못하므로 공납금을 바치지 못해서 학교를 가지 않고 놀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초등학교를 다니지만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아파서 늘 드러누워 있고 오빠는 한참 배워야 할 것인데 학교도 가지 못하고 시들은 풀같이 방구석에 앉아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의 갈 길은 어디입니까? 우리를 좀 살려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여러분 가난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이 집 안방에 들어가서 이 처참한 상황을 보고 가난을 찬미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 가난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대개 가난을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나는 옛날에 미국사람 한사람이 우리 강단에 와서 사람은 가난해야 신령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 된다고 그 뜨겁게 설교한 사람을 압니다. 그 사람은 하와이에 있는데 내가 이 사람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미국 가는데 그 집에 들어가 보니까 집이 두 채 자동차가 세대입니다. 집을 두 채를 가지고 자동차 세대를 굴리면서 가난을 찬미하는 이런 위선자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즉시로 이 소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게 빨리 찾아오너라. 너의 정황을 내가 알아보고 너의 가난을 내가 함께 걸머지자. 너의 고통을 내가 함께 걸머지자. 그래서 왔기에 그 오빠는 학교에 장학금을 보내서 너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가 공부를 시켜주겠다. 그리고 너의 어머니의 치료를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겠다. 그 소녀의 얼굴은 태양 빛같이 빛났습니다. 그는 삶의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노동현장에서 시들어 가는 저 가냘픈 청소년 소녀들을 우리가 실제로 보았다면 가난이 얼마나 우리를 묶는 쇠사슬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0만원 미만의 저임금을 받아가면서 하루에 8시간에서 10시간 중노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1평 짜리 방에 비위생적인 생활환경 가운데서 삶의 푸른 꿈이란 하나도 없이 시들어 가는 과로와 몰인정과 비인간화에 시들어 가는 이러한 청소년을 보게 될 때 여러분 가난이 과연 그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근로자선교 복지타운을 우리 교회에서 짓겠다고 선언을 하고 난 다음 제가 기대한 이상으로 사회적 반응이 일어난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로서는 힘겨운 것이지만 우리 교회에서 100억을 내어서 3000명을 수용하는 근로자선교 복지타운을 세워서 한달에 10만원 이하의 저임금에서 불행한 환경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청소년 소녀들을 도와줘야 되겠다. 우리 교회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언니가 되고 오빠가 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어서 그 마음속에 시들어 가는 인생에 꿈을 심어주어야 되겠다. 여러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한 것이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생활 가운데서 가장 뼈저린 것이 가난인 것입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고통을 당하는 이것이 인간 생활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과 괴로움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겠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그 사랑과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내 가슴속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이 들어와서 그 복음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있는 자가 없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나누게 함으로 주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축복이 비와 같이 쏟아져서 일시에 아침에 자고 나니 가난한 사람이 다 부요하게 되었더라 이러한 스토리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에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해서 잘 살게 된 우리들이 그 잘 살게된 것을 가지고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없는 자와 나누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물론 기도원에 가서 기도굴에서 금식하면서도 예수님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2000년 전에 살아서 역사한 역사적인 예수님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여러분 지금 현장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뵈올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주님께서 마지막심판 때 양의 나라와 염소의 나라로 갈라놓고 난 다음에 양의 나라에 말하기를 내가 굶주렸을 때 먹였으며 헐벗을 때 입혔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받아들였으며 목마를 때 마시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봐주었으며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주었느니라. 의인들이 말하기를 주여 언제 우리가 그렇게 하였나이까? 이 소자 중에 지극히 작은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내게 해 준 것이라. 그 다음에는 염소나라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이지 아니하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히지 아니하고 목마를 때 마시지 아니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지 아니하였느니라. 언제 우리가 주님이 그러한 사실을 보고 주님께 돕는 손길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지극히 적은 소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바로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어디에서 찾아야 되겠습니까? 저 가난한 사람 속에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 병든 자 속에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 소외되고 버림받고 짓밟힌 사람들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높은 산 험한 준령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에서 현재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그들의 얼굴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먹이고 입히고 돌보아주고 사랑을 베푼 것이 예수그리스도에게 먹이고 입히고 돌보아주고 사랑해 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억압되고 버림받은 사람을 우리는 멸시해 버리고 우리 혼자 교회 와서 장엄한 찬송을 부르고 우리 혼자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주여, 주여' 부르짖어본들 여러분 그것은 종교적인 독선이요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현장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우리가 아무리 장엄한 교회를 짓고 찬송을 부르고 거룩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예수그리스도는 우리 교회를 떠나서 그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억압된 사람들 가운데서 울고 계실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주무시는 것 보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와서 복음은 증거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직자들이 있고 정치가들, 권력가들, 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은 증거 해도 예수님이 주무실 때는 빈민들이 모여 사는 빈민굴인 베다니에서 와서 주무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러므로 여러분과 내가 예수를 찾기 위해서 예수를 참으로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하고 버림받고 억압된 사람들을 찾아가서 저들을 예수님처럼 섬기는 생활을 하므로 참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받들고 만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먹밥 하나 던져주고 입던 옷 하나 던져주고 신던 구두 하나 던져주고 나는 구제했다고 하면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도움이란 차라리 저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의 뜨거운 사랑으로 좋은 것을 서로 함께 하고 가진 것을 서로 나눌 때 진실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섬기게 되고 하늘나라를 전파하게 되고 산 복음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진실로 복된 소식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렇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축복을 주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그 부요를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헐벗고 굶주리고 울고 웃으시면서 인생과 같이 살았습니다. 맨발 벗고 다니시며 그는 노숙을 하셨고 걸식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있는 것을 다 벗어서 인류를 축복하기 위해서 대속을 하셨기 때문에 저의 가난하심을 말미암아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여러분과 나를 영육간에 부요케 하기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고 여러분과 나를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십자가 못 박혀 그 몸 찢고 그 피를 쏟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 예수를 의지해서 우리는 축복을 받고 저주에서 해방을 얻고 성공을 하고 은혜를 받았으면 이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우리도 가난한 자와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병든 자와 우리가 위로를 함께 나누는 우리들이 되어야 참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자기의 생활만 경건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성경에 참된 경건은 과부와 고아를 그 환란에서 건져주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한국 교회는 이제 100년 동안 자라났었습니다. 6.25사변이 난 이후에 40년 동안 재건해 왔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더 이상 자기 교회의 생활만 생각하고 교세 확장만 생각하고 교회를 더 아름답게 치장할 것만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에게 버림받고 예수그리스도 없는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일어나서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소외당하고 억압당한 우리 동포들의 현장을 찾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지 아니할 때 교회는 하나님과 사회에 버림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둘째로, 여기 예수님께서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나의 친구 한사람이 6.25사변 때 일선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는 포로생활을 안 했으니 모르지 그 추운 날에 저 함경도 포로수용소에서 천막에서 전봇대 하나를 전부 베개를 하고 전부 철고랑에 묶여서 잠을 잔다. 파수병이 와서 발로 전봇대를 차버리면 머리가 나무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또르르 하고 난다. 우리가 전부 일어나서 이제는 밥을 타 먹으러 가는데 철조망이 쳐 있는데 그 철조망 밑으로 밥풀을 얻어먹으려고 쥐새끼가 왔다갔다하는데 얼마나 쥐가 부러운지 모른다. 나도 쥐가 되어서 그 철조망으로 마음대로 들락날락 하면 얼마나 좋을까! 황혼이 되어서 새들이 남녘을 향해서 날아갈 때 나는 왜 팔자 기구하여 새가 되지 못하고 사람이 되어서 이 철조망 속에서 이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어야 되느냐 그 뼈저린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러한 이야기를 내게 한 것을 저는 지금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에서 포로가 된 것도 비극적인 일이겠지만 오늘날 현실생활 속에서 눈에 안 보이는 철조망 속에서 눈에 안 보이는 포로가 되어 사는 생활이 얼마나 비극인지 아십니까? 수많은 사람들은 미움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미워하고 아내는 남편을 미워합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이웃 간에 미워하고 살 때 그는 벌써 미움의 포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공포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불안의 존재입니다. 내일 내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오늘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끝임 없이 불안하고 또 어려운 일이 다가오면 공포에 떠는 것입니다. 공포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좌절감에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벽에 부딪쳐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좌절합니다. 오늘 서울대학교 한 소녀가 한강에 투신해서 자살하고 그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신문을 내가 읽었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회와 이 제도를 변화시킬 수 없으므로 자기의 무력감을 느끼고 자기 동료가 분신자살 한 것을 보고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한강 물에 뛰어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없이 인간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좌절하면 그러한 무모한 자살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또 나아가서 죄악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음란과 방탕과 아편과 술과 여러 가지 죄악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제도로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법으로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이와 같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줄 수가 있는 것입니까? 나사렛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미움 대신에 그 찢어진 피로 말미암아 용서와 화목을 가져다 주며 공포의 대상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그것을 이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좌절이 와도 하나님께 의지하면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으므로 좌절에서 이겨나갈 수 있게 하고 죄악의 포로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나사렛 예수 앞에 나오면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께서는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자가 되면 내일의 앞날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 사람은 눈먼 자가 됩니까? 사람은 마음속에 탐욕이 들어오면 눈이 어두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의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어 놓으시고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실과를 나게 하시고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곳에 에덴의 왕으로서 아담과 하와를 그 곳에 갔다 놓았지만 하나님이 한 마디 말씀했습니다. 동산의 실과는 다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지 말라 이를 먹는 날에는 너희가 반드시 죽으리라.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만물을 누리더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 가운데 주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 마귀가 뱀의 몸을 입고서 와서 하와를 꾀고 아담을 꾀었습니다. 너희가 이 실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너희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된다. 하나님께 의지할 필요가 없다. 인본주의적으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 탐욕의 음성을 듣고 탐욕이 마음속에 들어오자 눈이 어두워져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내일의 상황을 잊어버렸습니다. 오직 하나님처럼 된다는 그 탐욕 때문에. 탐욕은 인간의 눈을 어둡게 해서 완전히 장님이 되게 합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을 이와 같이 비극적인 죄악의 포로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경은 말하기를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 가장 근원적으로 우리를 파멸하는 것은 바로 탐욕인 것입니다. 정치가가 탐욕이 들어오면 자기의 망할 것을 알지 못하고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사업가가 탐욕이 들어오면 자기 망할 줄 모르고 스스로 과도하게 사업을 확장했다가 경제적으로 파탄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앞에 나와서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인생이 무엇이냐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을 자랑치 말라 오늘 네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줄 알지 못 하느니라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이 엄연한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면은 우리가 하나님을 깨닫게 되고 심판을 알게 되고 구원과 천국을 알게 되면 이 땅에 잠시 사는 동안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잠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에 감사하며 살다가 영원히 사는 그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탐욕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늘 마음에 일어나는 탐욕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를 받아 내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며 인간은 어떠한 심판을 받아야 할지 알게 될 때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탐욕으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에게 그 눈을 밝혀 주어서 인간의 실상을 봄으로 말미암아 탐욕 아닌 믿음 소망 가운데서 살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넷째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사망에 눌려 있습니다. 심적으로 불안과 공포에 눌려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질병에 눌려 있는 것입니다. 제도적으로 권력에 눌려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나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사망의 지배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 대신에 평안과 기쁨을 우리 마음속에 주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육체적인 질병은 주님께서 고치십니다. 주의 사역의 3분지 1은 병든 자를 고쳤고 12제자, 70인의 제자, 마지막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곳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학을 발전시켜서 병을 고쳐주시고 직접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제도적으로 권력에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공산 치하에서 숨 하나 제대로 못 쉬고 직장을 얻을 자유도 얻고 결혼을 마음대로 할 자유도 없고 이주의 자유도 없고 학문을 연구할 자유도 없는 그러한 폭정 하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한시라도 자유롭게 놓아주길 간절히 사모하고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산주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면 그 폭정의 쇠사슬이 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민주화 운동을 통해서 착실히 전진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민주화운동을 할 때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방법으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폭력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민주화가 안됩니다. 폭력은 폭력을 가져오고 마는 것입니다. 과격적인 혁명 사상을 가지고 민주화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민주화는 일시에 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진화과정을 통해서 평화와 대화를 통해서 민주화가 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 땅에 태어났을 때는 유대 땅은 바로 로마의 가장 극악한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유대 민족을 또 세계 인류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군사혁명을 일으키거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에게 사랑으로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차라리 자기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못 박힘으로 말미암아 몸 찢고 피를 흘림으로 죄악에 대한 그 무서움을 주님께서 경고하고 그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럼으로 폭력으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회개혁을 시도했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게 생각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인 사람이 300년 이내에 그 폭악한 로마 정부를 뒤엎고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한국 사회에 사회적인 폭력이나 그렇지 않으면 학원의 폭력을 통해서 사회를 개명시키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잡힐 때 베드로는 폭력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보호하려고 칼을 뽑아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그 귀를 주워서 도로 붙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베드로야 칼을 칼집에 꽂아라 칼로서 나오는 자는 칼로서 망하느니라. 폭력은 폭력을 부릅니다. 혁명은 혁명을 부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것은 우리의 나라는 사랑과 서로 십자가를 걸머짐으로 참 대화와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나라가 발전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최류탄을 쏘고 각목을 휘두르고 화염병을 던지고 치고 받고 피투성이가 된 저 인천사태와 같은 것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자유와 평화는 절대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김일성에게 이익을 갖다 줄지언정 이 나라에 제도적인 민주주의는 다가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기도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서로 십자가를 걸머지는 정신으로 서로 인정하고 용납하고 사랑하고 대화를 통해서 민주주의가 이 땅에 꽃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제도적으로 권력에 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폭력으로 얻은 정권은 폭력으로 망합니다. 주먹으로 얻은 정권은 주먹으로 망합니다. 참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 속에 서서 세워진 나라는 영원무궁토록 계속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럼으로 주님께서 오신 것은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난한 사람들이 농토를 팔고 집을 팔고 혹은 종으로 팔렸을지라도 전적으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9년 만에 큰 전국적인 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에 속죄제사 후 50년에 희년을 선포합니다. 그 희년의 날에는 종으로 팔린 사람은 그대로 놓여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집을 잃어버린 사람은 값없이 집을 도로 찾습니다. 농토를 팔아먹은 사람은 그대로 농토를 찾습니다. 모든 것이 원상 복구하는 희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왔다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이 마귀에게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한 인생에게 이제는 희년의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인류를 위한 대 제물이 되셨습니다. 영원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몸 찢고 피 흘려서 인류를 속하시고 그 다음 십자가 그 보혈을 통해서 오순절 날 임한 성령의 역사는 온 세계 은혜의 해를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이제는 의로 돌아가라 버림받은 데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라 병자는 치료받고 저주에서 놓여남 받고 지옥과 영원한 사망에서 영생 천국으로 돌아가라. 이제는 여러분, 우리에게 희년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돌아갈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는 자유케 하는 희년의 기쁜 소식이 전해져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모름지기 이 복음을 깊이 받아들이고 믿고 이 복음대로 자유를 얻고 나아가 아직까지도 자유를 얻지 못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가지고서 그들에게 우리가 얻은 자유를 나누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만군의 여호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걸머지시고 몸 찢고 피를 흘려주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예수님의 기막힌 사랑에 의해서 이제는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파되고 포로 된 자는 자유를 얻고 눈 먼 자는 보게되고 눌린 자는 자유를 얻고 은혜의 해가 전파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축복해 주시고 번창케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성도들을 오중 복음과 삼박자 축복으로 축복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일어나 가난한 이웃 속에 예수그리스도를 찾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교회당 안에만 계시는 예수님, 기도원에만 계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당하고 고통 당하고 억압당한 우리 이웃과 형제 그 속에 바로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도 예루살렘에만 있지 말고 베다니에 찾아가서 그곳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 섬길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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