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신앙의 성장과정

by 삶의언어 posted Aug 11, 2024 Views 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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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성장과정"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만물은 일정한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도 살아있는 신앙은 반드시 성장합니다. 만일 성장하지 않고, 그쳐버렸는다면 그는 죽은 신앙이요, 화석화되어버린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에 이르도록 성장해 나가는가 그 과정을 살펴보므로 우리의 마음을 성경의 역사에 조화시켜 자라나는 신앙의 자세를 가지도록 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우리의 성장하기 위해서 첫째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언제나 자아를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은 예외없이 탐욕과 이기주의적인 인본주의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무엇을 하든지 내게 속한 분깃을 내게 주소서. 내 중심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나의 이외에는 없습니다. 내가 있고 난 다음에 하나님도 있고 만물도 있을 수 있지 내 중심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않을려고 하는 것이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와같은 이기주의적인 자기중심적 인본주의적인 생활태도를 가진 사람하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딱딱한 인본주의의 껍질을 하나님께서 깨뜨려내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영생이 들어오고,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조차도 그 옛 타락의 부패성인 인본주의적인 이기주의가 그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하나도 남김없이 깨뜨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요셉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17세 소년으로서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기도도 많이 하고 또 자기의 아버님되는 야곱에게서 하나님 말씀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열 한 형제들은 별로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었는데 요셉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꿈에 하나님께서 요셉에 대한 계시를 받았었습니다. 하루는 꿈을 꾸는데, 들에 나가서 형제들과 함께 곡식단을 거둬들이는데 자기 곡식단이 가운데 서고 열 한 곡식단이 주위를 둘렀으니 자기 곡식단을 보고 절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한번은 밤에 자는데 꿈에 하늘을 쳐다보니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를 향해서 절을 하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주신 것인데, 요셉은 이것을 그저 꿈꾸고 자기 속에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인본주의 이기주의로써 그것을 자랑하고 싶고, 으시되고 싶어서 아버지와 형제들 앞에서 그것을 으시되었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의 혹심한 시기심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이 불행을 가져오게된 원인이 되고 말은 것입니다. 한번은 형들이 다 나가서 목축을 하는데 아버지께서 요셉을 불러서 형들이 안전한가보고 이 음식을 전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주신 음식을 가지고서 자색 옷을 입고, 그는 형들이 목축을 하는 곳에 찾아갔었습니다. 형들이 보고서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 꿈이 이루어지는지 안 이루어지는지 우리가 한번 알아보자. 그러면서 요셉이 오자 그 음식은 빼앗고 난 다음에 달려들어서 그 옷을 찢어서 벗겨버리고 벌거벗은 요셉을 마른 우물에 던져 버렸었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 그곳에서 죽어라. 그러나 하나님 섭리가 계셔서 그들이 음식을 먹고 난 다음에 요셉을 마른 우물에서 끌어내어서 아라비아 대상이 애굽으로 향료를 팔러 가는데 거기에 종으로 팔아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요셉은 벌거벗긴채 끌려가면서 울며울며 형들아 나를 살려달라, 나를 살려달라 했지만은 형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었습니다. 요셉의 벗은 옷을 짐승을 죽어가지고서 피를 적셔가지고서 아버지에게 갖다주므로 아버지가 그것을 보고 내 아들이 악한 짐승에게 찢겼구나 통곡을 하고 울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17세 된 그 소년을 깨뜨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내려가서 애굽 바로왕의 궁전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 종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그 당시에 종이라는 것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았었습니다. 짐승과 같은 주인의 소유물이었었습니다. 열 일곱살 한참 자라날 나이에 뼈가 휘어지도록 일을 하고, 가혹한 종살이 속에서 그의 마음은 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본주의가 깨어지고 인간중심의 생활이 깨어졌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원하는대로 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보디발이 시키는 대로만 한 것입니다. 그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을 했었습니다. 그와 같은 11년의 종살이 끝에 이제는 인정을 받아서 가정 총무까지 되었는데, 그만 보디발 아내의 모함에 빠져들고 말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내가 자기를 모함하고, 요셉이 자기를 겁탈했다고 거짓말을 꾸몄었습니다. 그 결과 보디발이 얼마나 분개했겠습니다. 요셉은 아마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시위대 뜰 감옥에 들어가고 말은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기약이 없는 2년동안의 종살이을 했습니다. 감옥의 모든 죄수들을 돌보아주고, 잔혹한 종살이을 했었습니다. 옛날의 감옥에 들어가면 무슨 정상적인 재판을 받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일단 들어가면 언제 나올지 모르는 기나긴 세월을 거기에 있다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 감옥에서 애굽의 떡장관, 술장관이 반역의 죄를 지어서 같이 감옥에 들어와 있다가 그들이 각각 꿈을 꾸고 요셉이 꿈을 해석했는데 그 꿈대로 술장관은 다시 복직이 되었으나 떡장관은 목이 날라가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 그때에 요셉이 그를 잡고 물었습니다. 나는 죄없이 이 곳에 들어와 있습니다. 제발 바로왕에게 이야기해서 내가 해방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행방되어서 감옥에서 나간 술장관은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2년여동안 그는 전혀 기약도 없고 희망도 없이 창살 뒤에 갖힌 몸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래서 요셉은 무려 13년의 기나긴 세월동안 종살이에 감옥살이에 그는 깨어질대로 깨어지고 말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할 그릇은 무자비할 정도로 이기주의와 인본주의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기주의를 깨뜨리지 아니하고, 인본주의를 깨뜨리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너희에게 여러 가지 불시험이 다가오는 것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시험이 다가와야 비로소 여러분과 내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깨어져서 태어난 사람 없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었다고 해서 그 마음이 깨어지는 것 아닙니다. 신학교에 가서 공부했다고 해서 깨어지는 것 아닙니다. 깨어지는 것은 불시험을 당해야 깨어지는 것입니다. 용광로에 거친 철광석을 넣어서 녹여야 찌거기가 떨어지고 쇳물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우리도 불같은 용광로의 시험을 통해야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신본주의적인 신앙, 순수의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신앙의 인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나오는 사람은 예외없이 하나님께서 연단하시고 깨뜨리는 것입니다. 많이 사용할 사람은 많이 깨뜨리고, 적게 사용할 사람은 적게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깨뜨리시는 사역을 받아들일만한 사람은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의 그릇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해서 하나님께서 깨뜨리면 둘째로, 어떠한 신앙단계로 들어가느냐 무조건적 신앙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요, 절대적인 의지를 가진 분이시오, 무엇이든지 당신이 기뻐하시는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는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향해서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왜 저렇게 하십니까, 무엇을 하십니까,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는 도무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이면 그 무엇이든지 예하고 순종할 따름인 것입니다.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질문이 많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합니까, 왜 하나님 저렇게 합니까, 하나님께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 하나님을 보고 명령도 하고 시킬려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깨어지고 나면은 그러한 잔소리가 없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어져서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과 그 존엄하심을 알면은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면 순종하겠나이다. 이와같이 조건없이 그냥 하나님 말씀이면 믿고 나아가는 이와같은 신앙을 얻는 것이 우리 신앙, 인격 성장의 두 번째 과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75세에 갈디아우로땅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가나안으로 나왔었습니다만 그는 인본주의적인 심정를 가지고 있었고 이기주의고 자기 고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으나 이런 불순물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깨어진데는 무려 25년의 기나긴 세월동안 불을 통하고 물을 통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당한 수모와 그 고통과 시련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매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께 완전히 깨어졌었을 때 그 마음의 소원대로 90세 되는 그 아내에게 아들을 얻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삭입니다. 이삭이 이제는 소년이 되어서 아버지 앞에 얼마나 귀여운지, 어머니에게 떨어질 수가 없고, 아버지가 도저히 눈밖에 내어놓을 수 없는 귀한 아들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루는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가지고 와서 죽여 내게 제물로 드려라. 이거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최근에 신한영화사에서 '천지창조'라는 영화를 수입해 와서 그 사장은 우리교회 집사시니까 저보고 와서 한번 보고 축복을 해달라고 해서 제가 갔었습니다. 그 영화 지금 서울 시내에서 상영하고 있는데, 저는 여태까지 영화, 기독교 영화를 본 중에 이만큼 감격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건 창세기부터 나오는데 성경 그대로에요, 성경과 대개 어긋난 일을 많이 하는데 성경 그대로 나오는데, 제가 어디에서 하도 많이 울어서 아주 옆에 앉은 집사님께 내가 미안해서 몰래 자꾸 울었는데 나는 원래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또 울면 많이 울어요.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외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려라'. 그 영화를 보니까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나와서 말합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백세에 내게 아들을 주시고 난 다음에 이를 잡아서 내 손으로 죽여서 제물로 드리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며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다 몸부림쳐요. 그러나 나중에 아브라함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나는 거기에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나 같으면 나 못해요, 나 여기서 죽여주세요 나는 못해요. 나는 아직 그렇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 아들이 어머니에게 뛰어가서 '엄마, 아버지하고 모리아산에 가서 제물을 드리고 오겠다' 엄마가 '얘야, 너를 떠나버리고 내가 어떻게 있니? 내가 나이가 구십이 되도록 너를 기다렸는데, 그래서 너를 낳았는데 너가 나를 떠나서 사흘동안 있나니' '아이 어머니 가만 계세요, 아버지 따라 갔다 올테니까' 아버지가 데리고 간다니 갑니다. 그 장면을 아브라함이 가슴이 쓰릴 것 아닙니까? 얼굴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졌어요 영화에 보니까. 아브라함이 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가서 장작불을 피워놓고, 이 아들이 아버지 품에 안기는데 허리춤을 풀어서 그 아들 손을 묶고 허리를 묶는데, 여러분 하나님께 순종하지만은 참 그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장작불에 얹져가시고서 칼을 빼서 찌르려고하는데 아브라함의 얼굴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지고, 얼굴에 핏기 하나 없고, 창백하게 되는 것. 나는 거기에서 성경을 28년동안 설교했지만은 현장에서 볼 때 내 마음에 다가오는 그 충격과 감동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만일 내가 돈이 있으면 우리 교회 주일학교 학생들까지 다 좀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정말 내 마음이, 정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 이삭의 묻는 말이 내가 오늘 설교하는데 여러분께 말하고 싶습니다. 이삭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라면 무엇이든지 해야됩니까?' 묶여서 아버지 칼을 받으려고 하면서 그렇게 물어요, 그렇다 하나님이 하시라하면 무엇이든지 해야 된다. 칼을 들어 내리 칠려고 하는데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마라. 그 얼마나 감격됩니까? 그 참 내 말재간이 없어서 그렇지, 내 말재간만 있었으면 여러분 지금 울었을 거예요. 여러분이 만일 시간이 있으면 그 천지창조를 한번 가 보세요. 이거는 성서적으로 된 것으로 아주 깊은 감격을 느꼈었습니다. 우리가 일단 깨어진 사람이면 하나님께서 말하시면 아브라함과 같이 자기 외아들이라도 질문하지 아니하고 내어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와서 불과 십일조 드리라고 해도 내놓을까 말까, 내놓을까 말까, 아이고 아버지 이거는 안되겠어요. 나에게 축복 주시옵소서. 이 그런 법이 어디에 있어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 50만 성도가운데, 지금 하나님께 십일조를 내는 성도가 몇 명인줄 압니까? 삼만명밖에 안됩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들 예수 잘 믿는다고 세계가 들썩거리면서 50만 성도에 십일조 내는 사람, 불과 2만명 밖에 안되는데 그리고도 교회가 떠나갈 듯이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손을 드는데 그 손이 부끄럽지 않아요? 아브라함의 신앙을 우리가 따라가겠어요? 그리고 난 다음 우리 신앙이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 외 독자 백세에 난 아들도 하나님이 내놓라고 하니깐 서슴치 않고 그 몸부림을 치면서 가슴을 치면서도 그 아들을 내놓는 그 신앙을 우리가 본받아야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어져서 절대 신앙, 이것 없이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신앙고백도 보십시오. 창세기 50정 20절에 보면 요셉이 얼마나 신앙이 자랐던지 형들보고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헤아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사 오늘날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려 하셨나이다'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었습니다. 형들이 나를 해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변화시켜서 만민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으니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었다고, 요셉은 그 처절한 고난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는 신앙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여러분 우리 신앙이 성장하는데는 반드시 용서가 따라야 되는 것입이다.
인간은 미움 속에서 그의 신앙과 인격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전쟁이 나서 포탄으로 온 산야를 다 황무지로 만들어 놓아도 봄날이 오면 자연은 그것을 용서해서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 산천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어도 세월이 지나가면 그 상처가 다 아물고 다시 마음에 평화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용서없이 여러분 상처투성인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 형들을 용서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3년의 기나긴 세월에 종살이에 감옥살이에 처절하게 고통으로 몰아쳤던 그 형들을 나중에 도와달라고 애굽에서 처자들을 이끌고 내려왔는데 그거 여러분 요셉이 용서해주지 않고 받아줄 수 있겠습니까? 여기 보면 창세기 50장 15절 17절에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이 주먹을 쥐고 뭐 어째고 어째 말하지 않고 형들이 와서 무릎을 끓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서 울었었습니다. 요셉은 깨어진 사람인 것입니다. 요셉은 그 마음속에 용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그 자리에서 13년의 원한에 쓰라린 고통을 다 던져버리고 형들의 죄를 용서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공개적으로 한 사람을 용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죠, 1981년에 '조용기, 과연 그는 이단인가?' 하는 책을 지은 김덕환씨. 그래서 내가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에서 분리돼 나오게 하고 통합 측에서 거센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당했는데, 저는 천추에 잊지못한 상처를 입었었습니다. 내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내 뼈가 썩어졌습니다. 그러나 긴 세월을 통해서 그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이 김덕환씨에게서 내게 며칠전에 편지가 왔습니다. 여러분 그 편지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조용기 목사님께 드립니다. 먼저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제 마음을 사로잡아 주시고, 회개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찬양을 드립니다. 몇 년 전부터 조목사님께 용서를 구하는 글을 드리려고 누차 마음을 먹었습니다만 직접 뵈옵고 무릎을 끓고 잘못을 빌어도 씻지 못할 죄인데 어찌 한 장의 편지로 목사님께 용서를 빌 수 있겠는가라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에 차일피일 미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기도도 나오지 않고 목사님의 인자하게 웃으시는 얼굴만 떠올라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편지를 쓰는 이 순간에도 스승을 욕되게 한 죄 어찌 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뿐입니다. 돌이켜보면 1981년 시월 불의한 제가 비판서를 쓴 것은 서대문 지역 교권주인자인 조명록목사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더구나 책자를 통해 세계 교회사상 경이적인 50만성도의 교세를 이룩한 여의도순복음교회와 보수주의 세계선교를 주도하는 조목사님께 타격과 상처를 주고 교계에서 완전히 매장시키려는 목적하에 쓰여졌으니 내용이 허위적 사실, 과장. 조작된 글이기에 역사의 하나님 앞에 그리고 선의의 피해를 당하신 목사님께 천추의 씻지 못할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비판서 출판이후 저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다 못해 전국 각처를 정처없이 방황하기도 했고,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으며, 일상생활엔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1983년 구월말경 통합측 총회 소장파 목사들이 저희 집에 찾아와서 모든 것을 책임질테니 제2탄을 쓰라고 유혹의 손길을 뻗쳐왔을 때 저는 교권주의자들의 비신앙과 비양심을 깨달게 되었기에 유혹에 넘어가기 전에 속히 조목사님을 뵙고 용서를 빌고, 평안한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이 살고 싶었기에 조목사님께 위로의 전보를 보냈던 것입니다. 더욱 제 양심을 가책케 한 것은 조목사님께서 이 불의한 제게 강단에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보고 크게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사주에 놀아나 목사님의 명예를 훼손한 죄가 어찌 구원의 반열에 들 수 있겠습니까? 어찌 목사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만은 죄가를 고백하고 앞으로는 닥쳐올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로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올립니다. 이렇게 두서없이 죄가를 털어놓고나니 이제는 저를 억누르던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된 듯 합니다. 이제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우울증도 사라질 것 같습니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조목사님께 특히 눈물의 기도를 드리시는 김성혜사모님과 가족들에게 무릎을 끓고 사죄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철부지가 저지른 죄이오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용서를 빕니다. 1986년 3월 6일 불의한 제자 김덕환올림' 여러분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에 50만 성도가 이 김덕환이가 우리 교회를 공격함으로 당한 그 수모와 그 고통과 그 괴로움이 얼마나 깊었었습니까? 4년여동안 우리가 눈물로 기도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격한 김덕환 이 사람을 변화시켜서 회개하게 만들었으니 이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공개적으로 이 김덕환 전도사를 용서합니다. 여러분도 용서하시면 '아멘'하십시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사람이 다 육을 가진 이상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사람은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회개하고 용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김덕환 전도사가 악을 행했지만은 그가 회개하고 용서를 공개적으로 구한 만큼 그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는 그와같이 자기 스스로의 잘못을 회개할 수 있고 저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고,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 사람의 발전을 위해서 도와줄 생각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여러분, 이 세상에 우리가 살면서 우리는 어찌할 수 없이 용서해주고, 용서받아야되는 것입니다. 용서없는 이 세상에서는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용서만이 우리를 성장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는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일반적인 사랑이 있지요. 일반적인 사랑이란 자기를 사랑해주고 돌봐주는 이를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진 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깨어진 자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이것이 깨어진 자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21절에 보면 요셉이 그의 형들과 그 자네들을 보고 말하기를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자기를 기나긴 13년동안 뼈에 사무친 고생을 겪게 한 사람들을 위해서 오히려 선을 베풀고 길러주겠다고 간곡히 위로한 이 요셉은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인간문제의 해답도 여기에 있습니다. 미움은 대화의 단절과 상호 파멸의 멸망을 가져오지만 사랑만이 이해와 타협과 문제의 해답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신앙에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자라나기를 원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장 계획에 우리가 동참해서 성령의 그릇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났지만은 자라는데는 긴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깨어져야되고, 절대 신앙으로 들어와야 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우린 비로소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원하고 기도하오니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 말씀을 들은 우리 성도들이나 테이프나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다 성장하는 신앙에 들어서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깨어지고 하나님께 절대 신앙을 갖게되고, 용서해주고, 용서받고,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성장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처소가 되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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