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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하는 세가지 조건

by 삶의언어 posted Jul 03, 2024 Views 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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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3가지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동거하거나 동행하기 위해서는 뜻이 맞아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뜻이 맞지 아니하면 함께 살거나 함께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상대방의 뜻을 알고 이해하며 ??에 살도록 노력해야 두 사람이 동거하고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과 함께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우리 뜻으로 끌어들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뜻에 걸려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뜻에 우리 자신을 합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단한 노력을 가지고 우린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려고 할 때 우리는 점점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두드러진 3가지 성품을 말씀해드리고자 합니다. 이 성품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하나님 성품에 우리 자신을 조화 시킬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 성경 말씀 가운데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다 아담의 후예들인 것입니다. 아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빗나간 존재인 것입니다. 바로 죄라는 것은 빗나갔다는 말인 것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 뜻에 전적으로 빗나가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지 않고 인본주의적인 생활을 하며 그 결과로 인간의 인격, 성품이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해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성이란 개조할 수가 없습니다. 선한 행위나 윤리나 도덕적인 행위로 개조해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옛사람은 죽여버리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옛사람은 죽여버리고 장사지낸바 되고 사흘만에 그리스도를 부활시킴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함께 부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세?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법적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옛사람이 죽어버리고 장사지낸바 되고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나서 거듭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려고 하면은 먼저 죽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흥시켜주시고 부활시켜주시지 죽지 않고 하나님은 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지 살아있는 사람을 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법적으로 예수 안에서 죽은 자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린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과 나를 영생의 생명을 주시고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법칙은 죽어야 살지, 살아서 살지는 절대로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우리의 신앙은 끊임없이 성장해야 되는데 우리의 성장 과정도 항상 죽고 사는 것이지 살고 사는 법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로써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이 75세가 되었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나갔지만은 그러나 그는 인간의 정욕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의 본토를 떠나라고 했는데 본토에서 모은 재산을 다 모으고 종들을 다 데리고 갔습니다. 친척을 떠나라고 했는데 자기의 조카를 데리고 출발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으나 그 믿음과 순종에는 불순물이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진실로 믿음의 사람으로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아브라함을 죽여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기 양양하여 젖과 꿀이 흐를 것을 기대하고 가나안땅에 도착해보니 가나안은 가뭄이 들어서 산천초목이 다 불타버리고 마실 물도 없고 먹을 풀도 없어서 가지고 온 모든 재산을 그곳에서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곳의 양무리와 소무리는 굶어죽고 종들은 다 도망치고 그리고 배고파 우는 조카와 허기져 주워있는 아내만 남았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희망과 꿈은 박살이 났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집이 아직 살아있어서 하나님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는 곧 애굽 길로 내려간 것입니다. 바로 애굽으로 날아간 것이 아브라함이 죽으러 내려간 것입니다. 애굽에 내려가니 애굽의 바로왕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즉시로 사라를 취해서 아내로 삼고 말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산천 떠나서 자기 재산 다 잃어버리고 종들 다 도망쳐버리고 심지어 애굽에 내려와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조차도 바로왕에게 빼앗겨 시집을 보내버리고 말고 인생의 가장 처절한 절망에 처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이 낭패를 당한다 해도 이처럼 재산 잃고 자기의 아내까지도 잃어버리는 처절한 절망에 처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죽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도 죽고 소망도 죽고 자기의 모든 인간의 고집도 다 깨뜨려지고 죽었었습니다. 그럴 때 죽은자를 살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죽었었을 때 다가오셔서 다시 부활시켜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내를 도로 돌려주시고 그를 이끌어서 가나안으로 불러주셔서 이젠 진실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소유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죽어야 살지 살아서 사는 것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서 그 모든 것을 상속받기 전에 먼저 죽어야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삭을 모리아산에 데리고 가서 하나님이 제물로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삭은 소년시절입니다. 아버지와 모리아산에 왔는데 아버지가 그를 묶어서 제단에 얹어 칼로서 쳐죽이려고 할 때 이삭은 그 마음속에 죽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칼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물이 될 것을 각오하고 그 자신을 내어놓았기 때문에 그는 이미 실제로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가 제단에서 내려올 때는 하나님은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킨 역사를 베풀으셔서 이삭은 그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던 것입니다. 야곱은 꽤가 많은 사람이었었습니다. 사기꾼이었었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외아저씨를 속이고 20년 동안을 생활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시기 위해서는 야곱을 죽여야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고향산천 돌아올 때 얍복 나루터에 왔었을 때, 형이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 동생을 죽이러 달려왔었습니다. 앞에는 형의 400인의 군대가 질풍처럼 다가오고 뒤에는 외아저씨가 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면 살려놓지 않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처하여 이래저래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얍복 나루터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그를 넘어뜨리려고 했었습니다.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고 난 다음 아침에 천사가 손을 들어 그 환두뼈를 치니 환두뼈가 어그러져 절름발이가 되었었습니다. 이제는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죽었었습니다. 이제는 그의 희망도 그의 소망도 고집도 다죽었었습니다. 살던지 죽던지, 흥하던지 망하던지, 성하던지 쇠하던지 주여 뜻대로만 하시옵소서. 그는 완전히 하나님께 내어 맡기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부활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삼아주셨습니다. 그가 얍복 나루터를 건널 때 어둠이 지나고 태양이 떠올랐었습니다. 그는 절뚝거리면서 자기의 가족들을 거느리고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습격해오는 형을 맞으러 나갔었습니다만 이미 그는 옛날 야곱이 아니라 죽었다가 부활해서 하나님이 같이 하는 이스라엘로서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야곱을 만나자 마자 마음이 감동되어 말에서 내려와서 뛰어와 동생을 얼싸안고 목을 얽매고 통곡을 하고 울었었습니다. 동생을 잡으려는 군대는 동생을 호위하는 군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지 산 자를 살리진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죽지 아니할 사람이 없고 또 부활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여러분의 생활 속에 크고 작은 수많은 시련과 환난이 다가와서 여러분의 옛사람을 더욱 죽고 더 깊이 죽고 더 철저히 죽이고 난 다음에 그 다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부활이 여러분에게 찾아올 때 여러분은 생명을 얻되 더 넘치게 얻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내가 천국에 올라갈 때까지 죽고 사는 체험은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 많이 죽이면 여러분을 더 많이 부활시킬 것이요, 여러분을 더 크게 축복하시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더 크게 죽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린 다는 것을 아십니다. 여러분에게 죽음의 체험이 다가올 때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원망하고 불평하여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면 여러분은 살리는 큰 체험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다가올 때에 여러분은 깨어지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내어 맡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성품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없는데 있는 것 같이 부를 수 있어요. 저는 어릴 때 저 시골 산장에서 자랐었습니다. 우리 아버님께서 개척한 시골 산장에는 동기부터 너무나 떨어져 있어서 매일 같이 들리는 것은 바람소리, 새소리, 풀벌레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었습니다. 저가 태어났을 때 친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주로 상상 속에 살았었습니다. 나 혼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산장에서 있어야 되기 때문에 상상 속에 살아서 내 상상 속에서 '야, 저 집밖엔 거기 큰 호랑이가 한 마리가 앉아있다. 그리고 저기는 여우가 있다. 저기는 늑대가 있다. 저긴 조심해야지.' 이러한 상상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가 이제 커서 소학교에 다닐 때, 우리 사촌들이 방학 때면 우리 산장에 놀러 왔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상상의 세계 속에 본 것을 그대로 말합니다. 우리 사촌형이나 동생들에게 "형, 형, 동생, 저 문밖에 굉장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여기는 여우가 한 마리." "가보자!" 떼를 지어 가보니까 호랑이도 없고 여우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 이름이 거짓말쟁이로 이름이 났었습니다. "그래, 용기는 거짓말쟁이다." 그래서 하루는 난 너무 답답해서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거짓말쟁이 입니까?" 그러니까 아버님이 나를 정색으로 쳐다보시면서 "용기야, 니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너는 상상력이 풍부한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그게 호랑이로 안보이고 여우도 안 보이는데 네 눈에는 그게 호랑이가 보이고 여우가 보이는 것은 니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상상력을 잘 사용하면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있다." 나는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날 꾸짖었다면 나는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나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그것은 너의 상상력이 풍부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실 여러분 오늘날 주의 세계 속에 들어와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려면 하나님 앞에서는 이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보려면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나이가 어린 애기를 나을 수 없는 나이가 되고 사라도 어린 애기를 가질 수 없는 나이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애기를 주겠다고 하시고 난 다음에 그 이름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넌 많은 민족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제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 많은 조상의 아버지요, 민족의 아버지요, 또 너의 아내는 사래가 아니라 사라, 여주인이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그 나이가 이젠 거의 100세가 다 되었고 그 사라의 나이도 90세가 다 되었는데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들을 나아서 많은 민족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을 받아들이기는 상상력을 통하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은 것을 보고도 어떻게 자기가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고 이름을 바꾸고 사래의 이름을 사라라고 여주인이라고 바꿉니까. 이것은 오직 그들 상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는 상상의 세계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대와 같이 마음이 끊임없이 요동하는 시몬을 보았었습니다. 시몬은 끊임없이 변화 받습니다. 그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금새 좋았다가 금새 슬프고 금새 믿었다가 금새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시몬을 보시고 "시몬아, 네 이름을 내가 베드로라 하리라." 베드로는 반석입니다. 여러분 갈대가 어떻게 반석이 됩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상상 속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갈대와 같은 신세이나 그는 반석이라는 그 사실을 마음속에 굳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상상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나중에 반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어서 아들을 낳았고 베드로는 반석이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는 여러분과 나의 상상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육신이 시간의 제한을 받고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없는 것을 지금 있는 것같이 우리는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3차원의 세계를 뛰어넘어서 4차원의 상상의 세계 속에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동행하려면 4차원의 세계에 상상의 세계에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했는데 아직 안수 받고 병이 들어 아픈데 어떻게 나았습니까. 이것은 여러분 의 상상 속에 자기가 나았다고 생각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직 환경이 거칠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데 네가 십일조와 헌물을 내게 드리면 내가 하늘 문을 열고 상할 곳이 없도록 붙지 아니하나 보라. 했는데 이것들도 현재 환경과 틀린데 어떻게 합니까. 현재 환경은 아무리 스산해도 내 상상 속에 하나님의 그 은총을 받아들여서 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기 위해서는 상상의 세계 속에 들어가야 하며 영롱한 꿈을 그려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이루어진 모습을 그림을 그려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례 어느 한 집에 심방을 갔는데 그 부형님께서 딸을 둘 낳고 아들을 낳아야 되겠는데 도저히 아들 낳을 자신이 없어서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해야겠다고 그래서 설악산에 가서 윤도?로 찢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아들을 하나 그려달라고 해 가지고서 아들을 그려서 집에 갖다 붙여놓고 바라봄의 법칙으로 결코 아들을 낳는다고 상상을 하고 그 상상 속에서 아들을 영롱하게 아들을 그려보고 믿음으로 기도한 결과에 달 둘 낳고 난 다음에 아들을 낳았다는 간증을 들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께서 상상의 세계에 가서 영롱한 꿈을 그려보고 그로써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믿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고 말씀한 것입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을 받을 줄로 믿으라는데 아직 안 받았는데 어떻게 받은 줄로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안 받은 것을 받은 것같이 믿을려면 우리 생각 속에서 상상 속에서 이미 받은 걸로 상상하고 우리의 영롱한 마음의 꿈을 그려서 이미 받은 것으로 꿈을 그리고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래야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상상하고 그림을 그려보는 사람에게 생겨나지 그렇지 않고는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우리가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상상 속에 받아들이고 꿈을 그려보고 이미 믿음으로 받은 줄 알았다면 이것을 끊임없이 입으로 고백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위의 3차원 ??를 뛰어넘어서 우리의 상상 속에서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속에 생각해보고 그려보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이미 누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엔 잡히는 거 없어도 내 것이 되었다고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애기도 없는데 나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아브라함이 입으로 시인한 것처럼 사라가 나는 여주인이 되었다고 시인한 것처럼 갈대인 시몬이 이미 자기는 베드로가 되었다고 이름을 베드로로 바꿔놓고 아직까지도 마음이 물결치듯 요동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베드로다. 나는 베드로다. 나는 베드로다. 입으로 시인한 것처럼 그렇게 될 때 그것이 믿음을 발생하여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하나님의 성품은 그렇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야 그것이 있게되는 것이지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를 때는 이미 늦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 환경 가운데 있는 것을 보십시오. 그것은 죄가 있고 질병이 있고 가난이 있고 슬픔이 있고 낭패와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대로 부른다면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거 없어도 십자가를 통하여서 죄사함 받은 나를 바라보고 성결하게 된 나를 바라보고 병고침 받은 나를 바라보고 축복 받은 나를 바라보고 천국을 얻은 나를 바라보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그대로 된 것으로 상상하고 그려보고 그리고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여러분, 그대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속세계에서 이루어진 그것이 여러분 미래에 나의 현실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속에 어린 아기를 잉태하지 않은 사람이 어린 애기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마음속에 상상 속에 여러분의 꿈과 환상 속에 믿음 속에 이미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잉태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내일에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위대한 창조적인 환경을 만들어낼 수는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속에 이루어진 것을 밖에 나타나게 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러분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을 가지고서 운명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여러분 속에 변화를 받아 여러분 속에서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믿음에 견고히 서서 나가는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믿어도 그 믿음은 반드시 시험을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믿음을 시험해보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고 난 다음에 즉시 환경이 믿음대로 변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계신 하나님께서 믿음을 시험해보시고 난 다음 때를 따라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믿음에 견고하여졌었습니다. 그는 초이성적인 믿음을 가졌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을 의지 한다면은 절대로 우리는 현실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바랄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바라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믿음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말하기를 초감각적으로 믿었습니다.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자기의 육신의 체험이나 감각을 초월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눈에 지금 보이고 내 귀에 들리고 냄새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느끼는 것에 따라서 우리가 믿으려면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감각이 어떻게 되던지간 그것을 제껴 놓아야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죽은 거 같았었습니다. 사라의 태가 죽은 거 같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애기를 낳을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초감각적인 것입니다. 또 믿음이란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말씀을 부여잡고 믿음 위에 굳세게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끊임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어떠한 환경이 되어도 원망, 불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이미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보고 말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리고 입으로 끊임없이 확신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확신하고 마귀 앞에서 확신하고 자기 앞에서 확신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입으로 확신합니다. 그리고 견뎌냅니다. 여러분 반드시 믿음은 시련을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한번 흔들어보시고 하나님께서 눌러보시고 불을 통하게 하시고 물을 통하게 하셔서 이 사람이 초 이성적으로 감각적으로 말씀 위에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입으로 믿음을 시인하면서 나가면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이 사람이 가진 믿음은 진짜 믿음이다. 이것은 가짜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런 믿음이 있으면 어두운 가운데서 빛이 나타나며 혼동 가운데서 궁창이 나타나며 바닷물이 갈라지고 육지가 나타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 해와 달과 별과 같은 영롱한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속에 풍?? 넘치는 하늘에 새들과 물 속에 있는 고기같이 많은 축복이 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 다스리는 삶을 살아가는 위대한 힘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공적인 사회생활의 비결은 우리가 만나고 대화하는 상대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적인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성품을 분명히 알고 그 지식에 따라 믿음의 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고 동행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사모하고 경외하며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반드시 만나면 죽입니다. 하나님과 부딪치면 죽을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려주시옵시고 그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고 그리고 믿음을 끝까지 경??? 붙드는 사람에게 같이 하여 주셔서 오늘날도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범사가 잘되게 하시고 강건하게 하시며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 기 도 -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므로 종종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왜 예수 믿었는데 내게 죽음이 다가오느냐. 왜 나를 벽에 부딪치게 하느냐. 개어지지 않고 원망하다가 부활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맙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걸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죽고 또 살고 또 더 죽고 또 더 살고 또 더 죽고 또 더 사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아버지 믿음이란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보고 듣고 믿고 말하는 것이 믿음이란 것을 알게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잉태되면 우리의 상상 속에 받아들이고 꿈으로 그려보고 기도하므로 확신을 얻고 입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시인하면서 나가는 것이 믿음인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시고 환경에 좌우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믿음이란 아브라함처럼 시련을 통해서 확립된다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왜 믿었는데 안되냐고 쉽게 낙심하지 말고 역경을 이기고 믿음을 계속하면 종국적으로 그 믿음이 위대한 성령을 가져오는 것을 알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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