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 이 시간 "종교냐 사랑이냐" 이와 같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등지고 여리고로 내려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속에 침통한 느낌을 느낍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등졌다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계시고 그곳에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 계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임하여 있는 곳입니다. 이 예루살렘을 등지고 여리고로 내려간다는 것은 여리고는 여호수아 장군이 저주한 곳이요 하나님의 저주가 있고 세속이 있고 악마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타락을 해서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절망에 처한 사람 많습니다. 이 사람도 예외 없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도중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등지고 저주받은 세상, 마귀가 들끓는 곳을 향해서 걸어가면 강도를 만나게 돼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 강도를 만나서 그 옷을 다 뺏기고 있는 모든 소유물이 탈취 당하고 얻어맞아 그만 죽게 되어 피투성이가 되어서 내던져버려졌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저주받은 세상, 마귀가 들끓는 세상으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따라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인 원수마귀에게 얻어맞아서 비참하게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귀가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인 것입니다. 예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러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그러므로 강도 만난 세상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미움이 많고 시기, 분노, 질투, 처처에 전쟁과 전쟁소문이 있고 기근과 지진이 있고 고통과 괴로움이 천지에 꽉 들어찬 이유는 이 세상 자체가 강도 만난 세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담 이후로 하나님을 버리고 저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피투성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여기에 제사장 한사람이 내려오고 있었어요. 틀림없이 이 제사장이 도와줄 줄 알고 "제사장이여, 나를 도우소서."하고 외쳤는데 이 제사장은 와서 이 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난 다음에 다른 길로 피해서 내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제사장도 역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절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레위 사람 한 사람이 총총 걸음을 하고 옵니다. 레위 사람이 나를 도와줄 줄 알고 "레위인이여, 레위인이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했는데 이 레위 사람도 역시 이 피투성이된 사람의 정경을 보고 난 다음에 피해서 다른 길로 내렸습니다. 이 레위 사람도 역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만에야 여행 중에 있는 한 사마리아사람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의 지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는 여행객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 불한당 만난 사람보고서 급히 달려가서 짐승에서 내려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붓고 붕대로 여며서 자기 짐승에 태워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주막에 가서 그를 두고 간호를 해주고 그 다음 주막을 떠날 때 은전 두 닢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요. 부비가 더 들면 내가 올 때 갚아드리겠나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친구가 됐는가? 선한 일을 베푼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자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교훈에서 우리가 배워야 될 것은 첫째 제사장의 문제인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율법과 제사를 주장하는 이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고 또 제사를 잘 지킬 의무가 있는 유대인의 종교를 지키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날 말하면 교회의 목사나 전도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제사장은 생각하기를 자기의 종교적인 신앙만 착실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 잘 지키고 율법 잘 가르치고 제사만 잘 지내면 되었지 무얼 강도 만나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길거리에 쓰러진 그 녀석에게까지 가서 그것을 돌보아주고 귀찮게 할게 뭐가 있느냐 종교는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 혼자 잘 율법을 지키고 제사의식을 잘 집행하고 나가면 나는 천국 갈 것이고 저 사람이야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던 말던 지옥에 가던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이기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성경에 분명히 말하기를 이 제사장이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고 아무리 제사를 잘 지내고 유대인의 종교를 잘 보존해 나갔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이 불한당 만나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져 죽어 가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 이상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이 제사장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제사장도 타락한 제사장입니다. 사랑이 없는 제사장,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고 제사를 잘 지내도 역시 그도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을 등지고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을 집행하지 않은 어떠한 율법이나 어떠한 제사의식이나 어떠한 종교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예루살렘을 떠나 저 저주받은 여리고로 타락의 길을 걸어 내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 점점 강해집니다. 신문이나 매스컴을 통해서 한국교회에 대해서 맹렬한 비난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난 중에 과도한 것도 있지마는 우리가 귀를 기울여보아야 될 일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은 기독교신앙에 ??? 백년동안에 양적인 성장에 주력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800만 내지 1천만의 성도를 품고 있는 거대한 교회가 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과연 그 양에 해당하는 질적인 성장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 제사장처럼 돼버리지 않았느냐 우리 스스로만 잘 믿으면 된다. 우리가 그저 하나님 잘 믿고 교회 와서 예배 잘 드리고 십일조 잘 내고 내가 금식기도 잘하고 철야기도 잘하면 되었지 사랑의 실천이란 필요 없다. 어떻게 불한당을 만나서 죄인들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우범청소년들이 길거리를 방황하고 우리 한국밖에 다른 나라에서 굶어죽던 전쟁이 나던 그것은 우리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가 그런 것에 관심 가질 것이 뭐냐. 나만 천당가면 될 것 아닌가. 그러므로 나만 잘 믿으면 된다. 우리교회만 잘 믿으면 된다. 우리 교파만 잘 믿으면 된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내가 잘 믿어서 그저 열심히 성수주일하고 십일조 드리고 그리고 철야기도하고 금식 기도하면 되었지 다른 사람이야 죽던 살던 내가 무슨 관심을 가질 것이냐.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제사장처럼 돼 버린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사회는 부정과 부패가 들끓고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 우범청소년들의 범죄는 점점 많아지고 수많은 가정은 파괴되어 가는데 불한당 만나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아무리 외친들 우리는 제사장처럼 사랑 없이 지나가 버리고 말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적으로 팽창했지만 사랑이 없는 교회는 역시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타락해 내려가는 제사장의 불과한 것입니다. 만일 한국교회가 이 시점에서 돌이켜서 사랑 없는 것을 회개하고 사랑에 중점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역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불한당을 만나 박살이 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유럽교회를 보십시요. 얼마나 교회당 건물이 좋고 교회당 위치도 좋지마는 교회 안에 들어가면 사람이란 없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 몇 분밖에 없고 얼음장같이 냉정히 차고 온 유럽 전체가 예수 믿던 흔적만 있지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 이처럼 불한당을 만나 처참하게 돼 버렸습니까? 옛날에는 그 교회가 사람들이 꽉 들어차고 찬미소리가 하늘로 진동했습니다. 그럴 때는 유럽교회나 영국교회가 전력을 기울여서 선교사를 보냈었습니다. 저 북방 얼음산과 저 남방 대양 섬에 있는 큰 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그 불한당 만난 사람 구출하기 위해서 선교사를 보내고 의약품을 보내고 물질적인 원조를 하고 불한당 만나 피투성이 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전력을 기울일 때 구라파의 교회는 왕성하고 성장했었습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다음 점점 사회변천이 다가오고 신학의 변천이 다가와서 그만 사랑이 식어지고 만 것입니다. 제사장처럼 우리만 좋은 신학을 가지고 우리만 잘 믿고 우리만 잘 하나님을 의지하면 됐지 뭐 사랑 같은 거 베풀 필요가 없다. 그 결과 유럽의 교회는 신학과 그 아름다운 제도와 건물과 그 조직을 가지고서 예루살렘을 떠나 저 여리고로 내려가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이제는 처참하게 교회자체가 불한당을 만나서 피투성이가 돼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그러한 전처를 밟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저는 우리교회가 이제는 사랑을 실천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교회의 ??확장에 있는 힘을 다해서 지금까지 왔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우리는 이 불한당 만난 사람, 피투성이가 된 사람에게 어찌하든지 사랑을 베풀어야 되겠다는 것을 가지고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교회 잘 알다시피 우리는 나누어 갖기 운동을 전개해서 우리의 있는 것을 가지고서 불우한 이웃과 나누자. 이런 것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전국 각지에 농어촌에서 수고하는 교역자들 약 400명에게 월급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분 아닙니다. 우리는 한 달에 심장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어린이 두 명을 계속해서 수술해주고 있습니다. 도 나아가서 여러분 우리는 힘을 합쳐서 100억 이상의 돈을 들여서 우범청소년들 길거리에 방황하며 범죄 청소년들을 한 곳에 모아서 저들을 감화시키고 먹이고 입히고 기술, 교육을 시켜서 직장을 구해주어서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사랑의 손길을 베풀기 위해서 여러분께서 헌금 작정도 하셨습니다. 교회가 이제 일어나서 우리의 주변에서 강도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서 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을 손을 내밀어서 도와주지 않으면 교회 자체는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타락해버리고 말 것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 제사장은 훌륭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율법을 잘지 키고 제사를 잘 지냈지마는 사랑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버림을 받고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둘째, 이 레위인도 문제인 것입니다.
이 레위인이 역시 그 자리를 내려오다가 이 불한당 만난 사람을 보고 돕지 않고 다른 길로 갔는데 레위인이란 유대교회에서 의식을 전담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재직과 평신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재직들과 교인들이 모여서 있는 힘을 다하여 교회를 아름답게 벽돌 건물로 짓고 교회의 제단을 장엄하게 장식을 하고 그리고 좋은 오르간피아노를 갖다놓고 아주 마음에 감동적인 성가대를 만들고 교회의 모든 좌석을 아름답게 의식적으로 꾸미고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세계에서 보기에 가장 아름답고 좋다고 자랑할지 모르겠지만 아름답고 장엄한 건물, 예배의식만 집행하면 되지 사랑의 실천은 무관이라고 생각할 때 역시 이 레위인도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벽돌 건물이 좋은들 그것이 무엇이 된단 말인 것입니까. 아무리 교회예배의식이 장엄하고 좋다해도 그 의식이 죽은 사람을 살립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랑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은 의식만 집행하면 되었지 뭐 사랑 같은 거 귀찮은 소리 그건 할 필요 없다고 지나갔지만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이 레위인도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타락해서 내려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모 교회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 집사에 불과하다. 난 조장, 구역장, 부 구역장, 아동 구역, 나는 평신도다. 교회 가서 주일 예배나 드리고 그리고 의식과 형식만 잘 집행해서 물로 침례 받고 성찬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면 됐지, 더 이상 무엇을 하겠는가." 아니올시다.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남편이 강도 만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아내가 강도 만나 있지 않습니까? 혹시나 여러분의 자녀가 강도 만나 피투성이가 돼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바로 이웃에 여러분의 일가와 여러분의 친지가운데 강도 만나 있지 않습니까? 원수마귀에게 붙잡혀서 영적으로 피투성이가 되어서 지옥으로 내려가고 있고 육신적으로 병들고 버림받고 혹은 헐벗고 굶주리고 마음에 고통을 당하고 슬픔을 당하고 우범청소년이 되어서 길거리를 방황하는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 있느냐 그건 내 종교와 상관이 없다. 나는 의식만 잘 집행하면 되었지 그런 것하고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종교는 타락한 종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레위인은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레위인도 불한당 만난 사람에게 무관심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랑을 베풀지 아니하는 신앙은 모두다 타락한 신앙입니다. 왜 우리 교회 성령이 충만하지 않느냐. 왜 나의 신앙에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지 않느냐. 나는 성주일 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철야도 하고 금식도 하는데 왜 내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느냐. 그것은 반드시 해야되겠지마는 거기에 사랑을 보태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은 완전하게 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나만 살면 된다고 말할 때 나도 죽고 남도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제사장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레위인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살려 줄 수 있습니까?
여기에 세 번째로 사마리아인을 보십시다.
여기 사마리아인은 종교인이라고 한 말이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에게 천시와 멸시를 당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는 종교인도 아니고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도 아니고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당했지마는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갔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여행 중에 그곳에 왔습니다. 여행 중에 어디에서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가 예루살렘에 가보니까 바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이 환자를 데리고 온 그 주막집이 예루살렘 바로 근교에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보니까 사마리아인은 여행 중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사마리아사람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합니까?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계시고 그곳에 찬양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곳으로 무엇이 이 사마리아인으로 올라오게 했습니까? 이 사람은 제사장도 아니요 이 사람은 레위인도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 속으로 올라옵니까? 이 사람은 목사도 아니고 전도사도 아닌데 이 사람은 장로, 안수집사, 권사, 서리 집사도 아닌데 이 사람은 평범한 사람인데 어떻게 하나님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하고 하나님 권능이 충만하고 하나님 중심에 와 있느냐. 왜 그러냐? 이 사마리아인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불한당 만난 사람보고 피투성이가 되 있을 때 그걸 보고 "야 이 사람아, 어쩌다가 그랬느냐. 나는 너와 상관없다. 나는 제사장이다. 내 종교만 잘 믿으면 된다. 안녕히 있어라."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혹은 레위인처럼 "나는 교회의식만 집행하면 되었지, 너 같은 사람 돌볼 필요 없다. 나는 간다."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보자마자 와서 짐승에서 내려서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것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베풀라고 하니까 오늘날 뭐 기상천외의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모두다 마리아 테레사처럼 돼 가지고서 전부 인도에 가서 일생을 내어 던져야 사랑인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자기가 가지고 있고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 사람,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름을 붓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포도주를 붓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붕대로 여며서 자기 짐승에 태워서 그래서 주막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오늘날 사랑을 베풀라고 하니까 무슨 기상천외의 일을 해야 사랑을 베푸는 줄 알지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 능력의 한도 안에서 불한당 만나 피투성이 된 이웃사람에게 최선의 도움을 베풀 때 이것이 바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죄악으로 말미암아 피투성이가 되어서 지옥으로 가는 사람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고 의로움을 받는 것을 우리는 나우어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 받도록 기도해 드려야 될 것인 것입니다. 병들어서 고생하고 절망에 처한 사람에게 예수 이름으로 나가서 사랑으로 따뜻하게 손 얹고 기도해주는 그런 사랑도 있어야 될 것이요, 저주와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 주님을 믿고 믿음 위에 서게 하고 우리 가지고 있는 것을 같이 입고 같이 나누어서 서로 격려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절망에 처한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이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내게 능력 있는 한도 내에서 그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100억 이상의 돈을 들여서 이 거대한 우범청소년 센터와 양로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그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조그만 교회에서는 그런 것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조그만 교회에서는 부랑아들 모아 놓고 난 다음에 옷을 입히고 밥 먹이는 정도는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리가 사랑을 베풀어서 불한당을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서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때 이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강도 만난 자, 이웃이 되는 교회가 안되면 오늘날 교회는 결국 사회에서 버림을 당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예루살렘에서 내어 던짐을 당하고 저 여리고로 내려가서 저주받아 버리고 말 것인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는 한국교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100년을 맞이해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이대로 수적인 증가만 해 나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진실로 이 강도 만난 우리 한국의 동족과 강도 만난 세계를 향해서 진실한 친구가 되는 교회가 될 것인가. 사랑을 베풀 것인가. 나만 알고 내 중심으로 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영적으로 심적으로 물질적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이웃 사랑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인가. 우리는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지 아니하면 다 타락한 목사요, 타락한 전도사요, 사랑하지 아니하면 타락한 장로요, 권사요, 안수집사요, 집사요, 평신도인 것입니다. 모두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가 버리고 맙니다. 사랑할 때만이 사마리아사람처럼 여행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품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 교회는 이 사랑의 내적 성장을 위하여 앞으로 전신전력을 다해서 나아가야 될 것인 것입니다. 아무리 장엄한 교회를 짓고 아무리 구름떼같은 초유의 거대한 성도의 숫자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교회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제사장 레위인들이 꽉 들어찼다면 그 교회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여리고로 내려가서 타락해버리고 말 것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있는 곳에 비로소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내가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그 개인과 그 교회에 믿음을 부어주셔서 믿음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 합니다. 사랑 없이 권능만 자꾸 받으려고 하고 믿음만 얻으려고 하면 절대로 믿음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것은 사랑 없이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넘치는 믿음을 얻으려면 내가 더 많은 사랑을 베푸십시요. 사랑을 베풀면 베풀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더 넘쳐나게 되고 그 결과로 믿음이 마음속에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개인과 교회가 사랑은 강조하지 아니하고 자꾸 믿음만 가지라고 하니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 하는 믿음인데 사랑이 없는데 믿음이 어떻게 생겨난단 말인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교회는 믿음만 주장하는 교회가 되지 말고 사랑의 토대가 잡힌 교회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사랑할 때 소망이 생겨요. 내가 남을 사랑해줄 때 내 마음속에 소망이 생겨요. 내가 남을 사랑하고 남을 도와줄 때 내 마음속에 소망이 솟구쳐 올라서 큰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마음속에 기쁨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기쁨이 없을까요? 이것은 남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 비칠 때 기쁨 오네. 근심걱정 물러가고 기쁨 온다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편을 사랑할 때 기쁨이 옵니다. 아내를 사랑할 때 기쁨이 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기쁨이 옵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 때 기쁨이 옵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돌보아줄 때 마음속에 기쁨이 옵니다. 교회가 일어나서 강도 만난 사람들에게 물신양면으로 사랑을 베풀 때 그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의 기쁨이 강물처럼 출렁이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서 크게 사랑 없는 삶을 산 것을 통회하고 자복하는 시간을 가지십시다. 우리가 주여 믿음 주시옵소서. 소망 주시옵소서. 한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삭막한 이유는 바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렇게 삭막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필요한 위대한 부흥은 사랑의 부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사랑 없이 살아온 죄를 우리교회로 우리 한국 전교회계가 무릎을 꿇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이시여 우리에게 사랑의 세례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넘쳐흐르고 불같이 타올라서 그래서 나만 잘 믿고 나만 신앙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교회만 잘 짓고 우리교회만 예배의식을 장엄하게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도 물론 잘 믿고 잘 주님을 섬겨야 되겠지만 그와 똑같은 힘을 발휘해서 강도 만나서 길거리에 쓰러져서 버림받아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풀어 품에 안고 저들을 우리 힘이 닿는 한 도와주는 우리 교인과 우리교회가 되십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슴을 펴고 설 수 있습니다. 주여, 나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채워주시고 더욱 축복해주셔서 더 크게 강도 만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축복을 구할 수 있는 타당성도 있게 되고 또 축복을 구할 때 담대하게 하나님이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오랜 세월동안 우리들은 제사장같이 나만 잘 믿으면 되었지,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 할 것이 무엇이냐 이런 태도로 믿어왔었습니다. 수많은 레위인들이 되어서 우리가 종교적인 의식만 매주일, 매주일 참여하면 되었지 뭐 나가서 강도 만나 피투성이 된 사회에 사랑의 손길을 베풀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 개인의 신앙도 서서히 타락하고 교회도 타락하고 한국 전 일 천만 성도가 타락의 길을 걸어갔었습니다. 부흥회 열어서 뛰고 구르고 춤을 추고 몸부림을 치고 땅을 치고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교회는 그 길로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여리고 길에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원하오니 우리 여의도 순복음 교회도 이 시점에서 대우값을 하여 더욱 사랑을 베푸는데 전력을 기울이게 도와 주시옵소서. 사랑 없으면 무슨 소용 있나. 온 천하를 얻고도 사랑 베풀지 아니하면 그 교회는 타락한 교회인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50만 성도를 거느리고 세계 최대 건물을 지어도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그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아니고 여리고에 있는 교회인데 어찌 주님을 마중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 제사장도 레위인들도 합쳐서 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종교를 준 것도 아니요, 의식을 주신 것도 아니요, 당신의 깨어진 몸을 주시고 흘리신 피를 주셔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그리고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 하시옵나이다. 오늘 이 성찬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먹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먹고 마시는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를 지으심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넝마 같은 인생 피투성이가 된 인생을 위해서 주님께서 당신이 살을 찢어 먹여 주시고 피를 쏟아 마시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서 하나님의 백성 되게 만들어 주심을 감사 하옵나이다. 이 사랑을 어디에서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가 깨어지게 도와 주시옵시고 우리 교만 다 내어 던져버리게 도와 주시옵시고 우리 영도 마음도 몸도 생활도 재산도 그 발 앞에 내어 좋게 도와 주시옵시고 진실로 그리스도에 잡혀서 예수님의 사랑을 위해서 사는 우리들이 다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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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종교냐 사랑이냐
by 삶의언어 posted Jun 13, 2024 Views 1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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