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

by 삶의언어 posted Jun 16, 2024 Views 1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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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한복음 4장 4∼10절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 부르러 오셔
누구나 주님 믿으면 죄 용서받고 구원 얻어
열심히 복음 전해 더 많은 영혼 구원해야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우리 오늘 함께 목욕하러 가자”고 말하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야. 나는 몸에 때가 너무 많아서 부끄러워 목욕탕에 갈 수가 없어. 때를 좀 씻고 깨끗하게 하고 난 다음에 목욕탕에 갈 거야” 이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친구야, 몸에 때가 있기 때문에 목욕탕에 가는 것이지 때가 없으면 목욕탕에 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많은 사람들은 “나는 죄가 많아서 교회에 나갈 수가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1. 의원은 병든 사람에게 필요함

 예수님께서 한번은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세리 마태가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세리 마태가 기뻐하며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식사를 대접하는데 세상이 다 아는 죄인들이 함께 모여 고함을 치고 박수를 치고 크게 웃고 하면서 식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항상 비난하고 공격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쯧쯧쯧. 세상에 세리 마태와 저 죄인들하고 모여서 함께 웃고 농담하고 잡담하고 밥 먹고 하는 사람이 너희들의 선생이냐?”라고 말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유대를 다스렸기 때문에 로마에서 세금을 받아 갔습니다. 그리고 세리들은 로마의 앞잡이가 돼서 같은 동포인 유대인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세금을 갈취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사용할 돈도 빼앗아갔기 때문에 유대인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세리의 집에 가셨을 뿐 아니라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시니까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소용없고 병든 자에게야 소용이 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며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호세아서에 있는 말씀인데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시지 율법적인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가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상속 받아 집을 떠나 멀리가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흉년이 드니까 둘째는 먹을 것이 없어 거지가 됐습니다. 완전히 남루한 옷을 입고 거지가 되어 오갈 데가 없으니까 빈손 들고 아버지께로 와서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사용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아들을 끌어안고 반기며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밭에서 일하다가 늦게 돌아온 형이 그 사연을 알고 난 다음에 화가 나서 집에 안 들어옵니다. 아버지가 가서 “집에 들어오너라”하고 말하자 큰 아들은 “아버지,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창기와 모두 낭비하고 난 다음에 저렇게 거지가 돼서 돌아왔는데 그를 환영합니까?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한테 충성하고 아버지 집을 떠난 적이 없는데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 주셨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러나 저 아이는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과 형제의 마음이 다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탕자가 돼서 가산을 탕진하고 빈손 들고 오더라도 건강한 몸으로 온 것을 기뻐해서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지만 형제만 돼도 율법을 요구합니다. “마땅히 죄를 받아야지. 마땅히 고통을 당해야지. 왜 처벌 없이 받아들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와서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원하시지 율법으로 우리를 다스리기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와 같이 유대인의 흉악한 원수이자 죄인인 사람도 구원하셔서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2.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낮 12시쯤에 해가 쨍쨍 비치고 땀이 나고 한참 더울 때 우물가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에 나옵니다. 그 여인은 사마리아가 다 아는 추한 여자입니다. 여러 번 시집을 가서 남편을 여러 번 바꾸고 음란하고 방탕한 여자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같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도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대낮에 아무도 우물가에 오지 않을 때 물을 길러 나온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본 체 만 체 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에게 물을 좀 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깜짝 놀라서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자가 “이 우물이 얼마나 깊은지 아십니까? 이 우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준 우물로 그 자녀들이 여기서 다 물을 마셨는데 당신은 물을 풀 두레박도 없고 그릇도 없으면서 무슨 생수를 내게 준다는 말입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눈이 둥그레지면서 “그래요? 그러면 그 물을 나에게도 좀 주십시오. 다시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면 남편을 데리고 함께 오너라”고 말씀하시자 여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나는 남편이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화들짝 놀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보니까 나의 생애를 환히 들여다보는 선지자군요?”

 그리고 난 다음에 여자는 곧장 예배 처소 논쟁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여자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니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21절로 2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상당히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식과 형식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는다고 하시는데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아휴,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는 메시야가 온다고 듣고 있는데 그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여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라” 그러자 성령이 역사해서 이 여자의 눈이 확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요,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던져 놓고 동네로 들어가서 동네방네 고함을 쳤습니다. “나의 생애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다 알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이 메시야가 아니냐?” 그래서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떼를 지어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붙잡아 며칠 동안 머물게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신앙을 갖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됐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에서 제일 손꼽히는 죄인을 건져 내어서 그에게 참된 행복을 주신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남편을 바꾼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집을 바꾼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물질을 많이 가진다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생수를 가져야 합니다. 이 생수는 예수님 이외에는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어떤 섬에 가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그 섬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부부를 초대했는데 그는 75세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나는 이 섬에서 제일 큰 부자입니다. 멋진 요트가 있어서 어디를 가든지 그 요트를 타고 바다 위를 다닐 수가 있으며 자가용 비행기가 있어서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고 자가용 헬리콥터가 있어서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늘 비참합니다. 마음에 고통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평생 동안 물질을 모으려고 애썼는데 돈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그 다음 날 오후에 75세 된 나이 많은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돈이 2만원도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으니 그 행복과 기쁨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 두 노인은 똑같이 75세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자가용 비행기, 헬리콥터에 요트까지 가지고 있으면서도 극히 불행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단돈 2만원도 없으면서도 그 마음속에 기쁨과 행복이 넘쳤습니다. 이처럼 행복이란 마음에서 넘쳐 나오는 것이지 환경에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아름다운 환경을 꾸며 주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영원한 행복은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이는 도저히 마음에 안정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껍데기뿐이니 알맹이이신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완전하게 됩니다. 알맹이이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계셔야 비로소 마음에 평안함과 안정감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계셔야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업을 할 때 기쁘고 즐겁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삶은 사는 것 같으나 헛사는 것입니다.

 

 3. 죄인에 대한 주님의 사랑 

 죄인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 4절로 7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양 100마리를 돌보는 사람이 99마리는 평안히 우리에 있는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어지간하면 “99마리가 있으니 한 마리쯤은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잊어버리자”라고 할 것입니다. 혹시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러 갔다가 도둑놈이 와서 99마리를 훔쳐 가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99마리는 우리에 있으니 그대로 두고 한 마리를 찾아 산과 들로 헤매다가 그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돌아와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고 잃었던 양을 찾았다고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주님께 두 손 들고 오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내가 잘났다. 내 힘으로 살 수 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좋아하십니까? 아닙니다. 깨어지고 회개하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하면서 주님께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 하나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버림받은 자, 이런 사람을 예수님은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십시오. 어지간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흉악하게 죽이는 형틀이 십자가입니다.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박고 공중에 높이 매달아 놓는데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빈혈이 나타나고 탈수가 일어나고, 몸의 고통과 괴로움이 극에 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옆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한 강도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우리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잃어버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죗값을 대신 갚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고통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주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예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우니까 ‘아! 하나님이 날 버리셨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선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정의로워서 구원받았다”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데 우리의 행위로 그것을 갚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선행은 죄의 빚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이 생명을 바쳐야 그 빚을 갚을 정도로 심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바쳐서 그 피로써 우리의 죄를 청산하셨기에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니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도 한 명의 강도를 구원하시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옆에 있는 죄인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고백하자 주님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인데도 그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이라도 죄인이 회개하면 주님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죄가 많아서 구원을 못 받는다. 나 같은 죄인은 주님이 돌봐 주지 않는다’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구주로 오신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의인이면 구주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더러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 같은 죄인은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는다. 너 같은 죄인은 하나님이 미워하신다”는 마귀의 유혹에 속지 마십시오.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나도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가면 하나님이 살려 주신다”라고 선포하십시오. 또한 흉악한 죄인들에게도 언제나 희망을 주십시오. “당신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같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주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못난 모습 그대로 빈손 들고 나오십시오. 주님이 구원해 주시고 성령으로 교화시켜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를 이 땅에 확장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재림하십니다. 주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으로 우리를 옮기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하늘나라 백성을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전도해서 더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고 구원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누군가 우리에게 전도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또한 우리도 전도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주님께로 나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열정을 가지고 이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