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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예수님의 사역

by 삶의언어 posted Jun 04, 2024 Views 1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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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진정한 예수님의 사역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과연 어떠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을 까요? 여기에 대한 분명한 성서적인 해답을 갖지 못하면 우리가 신앙에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지도자라 해도 타인을 지도하려면 그 지도 이면을 분명히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사역 초기에 그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에 오셔서 그는 구주로서 지도 이념을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지도이념 선언을 예수님의 실제적인 삼년 반 동안의 행적과 비교해 봄으로 말미암아 진실로 예수님이 선포한 지도이념의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지도이념은 예수님의 실제의 그 삶의 모범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지 사람이 마음대로 이러쿵저러쿵 추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향 땅 나사렛에서 복음선언의 제 일단을 외치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첫째는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나로 하여금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당시에는 전 세계가 다 가난했고 또 말할 필요 없이 로마 사람의 지배와 학정 하에 있는 유대 사람들은 호구지책을 겨우 유지해 나갈 정도밖에 삶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예수께서 오셔서 내가 가나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것을 자못 해석해 가지고서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사회적인 제도를 변혁시킴으로서 가난을 물리치고 부의 공평분배를 가져오게 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이 정치적인 사회적인 제도를 변혁시키는 운동을 했나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행위를 보고 그 말씀을 우리가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그 행위를 볼 때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사시던 그 나사렛 땅이나 그렇지 않으면 유대 땅에 조금도 정치적인 사회적인 제도 변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러 오신 것이 정치적인 사회적인 제도 개혁으로 말미암아 빈부의 차를 없애고 부의 공평분배를 시작하였더라면 주님께서 실제로 소매를 걷고 정치 사회 결사를 위해서 이와 같은 제도변혁을 가져와야 할 터인데 예수님의 삼년 반 동안의 공생애를 통하여 실제 그 행위에서는 이런 일을 전혀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을까요? 주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한다 했는데 그러면 어떤 복된 소식을 전했을까요? 예수님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복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먼저 주께서 복된 천국의 소식을 가난한 자에게 전한 것입니다. 왜 하필 가난한 자에게 전했느냐? 그것은 현재 배부르고 현재 웃고 현재 부귀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심히 적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안주한 사람들에게는 내일에 대한 더 나은 생활에 기대를 갖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해 봤자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주님께서 지금 배부른 자들에게 화 있을 진저 너희는 나중에 굶주리리로다 지금 웃는 자여 화 있을 진저 나중에 울리로다 이유는 현재 배부르고 현재 복 받고 현재 잘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지적해서 택한 사람들 이외는 마음 문을 열고 내일에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과 새 세상에 대한 소망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배고픈 사람 현재 헐벗은 사람 그리고 현재 가난한 사람 이런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할 곳이 없고 현재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에 대한 선포를 받을 때 즐겁게 마음 문을 열어놓고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때 병들고 고통당하고 문제를 안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증거할 때 쉽게 마음 문을 열지 배부르고 등 따습고 모든 것이 편안한 사람들은 좀처럼 예수의 복음이 그들 속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나한 자에게 천국의 복된 소식을 전했습니다. 또 나아가서 주님께서 실제로 역사하셔서 정치적인 사회적인 제도를 변화시켜서 가난을 물리치려고 하시지 안았지마는 우리 주님이 실제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 가난과 자주를 속량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산새도 들집이 있지마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하셨습니다. 찢어질 듯이 가난한 처소에서 태어나셔서 죽으셨을 때도 침대에서 돌아가시지 못하시고 험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빌린 무덤에 그 몸을 안치하셨습니다. 이렇게 가난하게 살은 이유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저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하심을 인하여 너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난한 삶을 대속하기 위해서 그 몸에 가난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난한 삶을 대속하기 위해서 그 몸에 가난을 실제로 짊어지신 것이며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저주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저가 실로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주셨다는 것은 사회적인 정치적인 제도 개혁이 아니라 우주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주님께서 실제로 가난과 저주를 몸에 짊어지시고 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줄 수 있는 그러한 길을 만들어놓고 만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복을 받은 것은 하나의 집단적인 사회적인 국가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생활 속에 물과 양식에 복을 내리고 저주와 가난을 주께서 제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을 성경에 주신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주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여 주시겠다는 것은 집단적인 사회적인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치와 사회적이 제도 개혁을 통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믿는 자 한사람 한사람의 생활 속에 성령으로 역사해 주셔서 가난을 대속하시고 저주를 주님께서 물리침으로 우리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애쓰고 힘쓸 때 가난과 저주를 물리치고 주님께서 축복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전하신 우리 축복의 소식입니다. 이러므로 예수의 복음이란 우리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가난과 저주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이와 같은 신념을 가지고 우리는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확실한 증거는 역사적인 사실 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거짓마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복음이 증거된 나라와 민족마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아니하고 남에게 꾸어줄 지라도 꾸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나라마다 가나에서 하나님께서 해방해 주셨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팔레스타인에서 로마로 독일로 구라파로 영국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지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나간 역사의 자취마다 가난의 흔적이 살아진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증거하면 미신과 무지를 제해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등과 민주를 가져오며 자연과 환경에 주인 의식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져서 미신에서 해방시켜주시고 과학적인 발명과 발견을 갔고 오고 인간의 준엄성을 깨달아서 우리 모두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것을 알게 되어서 서로 준엄성을 지키게 해 주시고 축복의 영 성령이 함께 임하시사 우리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번창케 하는 역사를 베풀어주셨고 지금도 성령이 예수 안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음의 말씀은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여 주는 아름다운 믿음을 우리에게 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복음 선언의 말씀을 열어주신 것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정치적인 포로에서 노예 해방을 실제로 가져오겠다는 말씀일까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나라는 로마의 압제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정부를 대적해서 일어났다가 잡힌 정치적인 포로가 많았고 그 당시에 노예제도로 말미암아 전쟁에 진 사람들은 노예로 잡혀서 종살이하고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그의 복음 생애를 통해서 과연 정치적인 포로와 노예해방을 실제로 실천하셨을까요? 주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는데 실제로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볼 때 주님은 정치적인 포로와 노예 한 사람도 해방시킨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를 먼저 전하러온 세례 요한이 헤롯왕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을 때 그 세례 요한 조차도 주께서 석방을 시키지 아니한 채 내버려두어서 복이 베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러 왔다는 말은 거짓말일까요? 예수님께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것은 정치적인 노예해방이 아니라 영적인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해방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악마의 포로에서 죄악의 묶음에서 절망의 포로에서 해방시키는 영적인 정신적인 개인의 자아 생애속에서의 위대한 자유와 해방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볼 때 주님은 가는 곳마다 악마에게 묶인 자를 놓아주었습니다. 더구나 거라사인의 이 정신병 들린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뛰쳐나와서 정신이 마귀에게 잡혀서 무덤에서 벌거벗고 돌로서 자기 몸에 상처를 입히며 주야로 고함치며 지냈습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없었으나 예수께서 건너가서 이 거라사인을 한마디 말씀으로 군대 마귀에게서 놓아주시고 정신이 올바르게 들게 하시고 부모와 처자에게로 돌아 갈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은 이와 같은 악마의 포로에서 해방시켜주는 일을 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양심의 죄 사회 도덕적인 죄 하나님에 대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책에서 우리가 어떻게 종교를 가지나 선한 행동을 하나 적선을 하나 이것으로서 우리 마음의 고통을 해방시켜 줄자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오셔서 여러분과 나의 죄를 그 일생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죄 없는 자로서 다 청산하여 주셔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청산하심으로 예수님 안에서 죄책에서 해방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죄에서 놓여나서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이와 같은 자유를 주님께서 선호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절망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실망하고 절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은 절망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절망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이 땅이 아닌 영원한 삶을 약속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로 우리를 허락해 주시고 또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내어 맡길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약속을 주심으로 끈기 있게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서 시간을 끌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는 소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한 것은 정치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노예 해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자유와 악마에서 해방, 죄악에서 해방, 절망의 포로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주께서 하셨고 지금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러한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우리는 마귀에게서 해방을 얻고 죄에서 해방을 얻으며 절망에서 해방을 얻고 믿음, 소망,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가질 수 있는 영적인 개인적인 생활 속에서의 해방 운동을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하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말하기를 이 말은 바로 문맹이 된 사람에게 야학을 열고 학교를 세워서 글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 예수께서 야학을 열거나 문맹 된 사람에게 히브리어를 깨닫게 해서 글자를 가르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것은 실제로 눈먼 자를 주님께서 안수해서 고쳐주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님 된 사람을 안수해서 주님께서 흙으로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셔서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매 눈이 밝아졌습니다. 저는 요번에 루이 벨에 가니까 실제로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고 눈이 밝아진 장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국에 관광단들이 성지 순례를 가는데 눈의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기어코 자기도 가서 실로암의 샘물에 눈을 씻어보겠다고 고집을 해서 관광단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서 실로암 물에 그가 눈을 씻고 난 다음에 예수님 당시처럼 그가 눈이 밝아지고 말은 것입니다. 그래서 온 관광을 같이 간 사람들이 크게 감동을 느끼고 안 믿는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믿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의 육신의 눈을 이렇게 뜬다는 것은 아름답고 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육신의 눈이 아무리 떠서 밝히 본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살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을 살다가 눈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나이를 먹으면 눈이 나빠지고 또 이 세상에서 죽으면 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눈 밝기로 유명했고 참 눈이 밝은 것을 굉장히 자랑했었습니다. 그래서 남이 무어라 말을 해도 내 눈은 언제나 2.0이다 그랬었는데 아! 요사이는 그 말을 안합니다. 왜 그라느냐 지금은 글을 쓰는데 잘 안보여요. 나도 가는구나!! 늙는 길은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쳤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는 말대로 인생이란 별수 없이 가는 것입니다.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눈이란 영적인 눈을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보지 못하는 그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밖에 보지 못하는 그런 눈. 물질의 썩을 것 밖에 보지 못하는 그런 눈을 가진 이것이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가 가는 길에 영원한 멸망의 언덕길을 건너서 벼랑으로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히히 낙낙하고 웃으며 춤추며 가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이것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가장 무섭고 처절한 절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은 이 영의 눈을 뜨여 주므로 말미암아 이 멸망할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과 영원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보고 믿고 구원을 받게 하는 일을 해주시겠다고 약속을 해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천년을 살더라도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영웅호걸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시어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여주시고 비로소 우리 인생은 하루살이 같은 존재요 이 세상의 삶 전체가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께서 이 멸망의 길을 피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예비한 세계로 들어가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주께서 우리 가운데 와서 하는 역사가 그 역사인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눌린 자를 자유케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정치적인 압제 하에서 경제적인 압제 하에서 종교적인 압제 하에서 주님이 자유운동을 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사를 하고 조직을 짜서 대모를 하고 폭동을 하고 그리고 힘의 폭력이라도 써서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러분, 성경말씀은 그렇게 인간의 철학으로 간단히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실제로 증명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고 해서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독립군을 일으킨 적도 없고 사회 폭동을 일으킨 적도 없고 밀란을 일으킨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경제적인 압제 하에 있는 사람들을 놓아주기 위해서 그래서 어떤 공산주의 사회를 형성한 적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고 하시면서 정치적인 압제와 경제적인 압제에 있는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사회제도적으로 주께서 놓아주는 그러한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놓아준 것은 그러한데 눌린 자를 놓아준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눌린 자를 놓아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께서 그의 생애속에 정치적, 경제적 압제에 놓인 것을 실제 사회제도적으로 놓아준 적은 없지마는 주께서 마귀에게 눌린 자는 가는 곳마다 놓아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손길 가는 곳에 병이 물러가고 마귀가 떠나가고 마귀에게 눌린 자에게 절망에 처한 자들이 해방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이러한 영적인 사역을 하시는 것이지 주님께서 정치적인 사회적인 차원에서 의미적인 일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늘 이 시간에 모인 이 자리에서 마귀에게 눌린 자를 주님께서 고쳐주셔서 올바르고 건강한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자녀, 사회인이 되어서 그래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이러한 일을 주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요번에 탈사 오클라호마에서 주일날 저녁에 예배를 마치고 아무도 안수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칠 대로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뉴올리언스에서 매일같이 하루에 아침, 저녁 두시간씩 강의하고 TV에 출연하고 또 TV제작하고 그랬다가 토요일에는 루이 벨에 갔습니다. 루이 벨에 가서 도착하자말자 그 길로 나가서 600여명의 교역자들에게 강의하고 그 다음 한국교포들이 모인 곳에 가서 또 강의하고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서 1부 예배, 2부 예배 약 4000명에게 설교하고 난 다음에 자가용 제트기를 타고 오클라호마 탈사에 와서 저녁 예배로 호텔에 그냥 가방과 짐만 던져놓고 교회로 뛰어나가서 2000여명의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요. 그래서 목사님에게 그랬습니다. 아무도 안 만나겠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조금 쉬었다가 호텔로 가서 나 좀 자게 해달라고 했는데 목사님이 들어오시더니 하는 말이 한국 사람 두 사람이 시카고에서 왔다면서 목사님 문 앞에 딱 진을 치고 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돌아가라고 하니까 죽으면 죽었지 못 간다고 그르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이거 큰일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 가면 우리 교포들이 때를 쓰는데 말로 못합니다. 탈사 오클라호마 호텔 앞에서 교인들이 모여와 가지고서 집에 가서 안수해 달라고 4시간을 호텔 로비에서 진을 치고 대모를 합니다. 4시간을 그러니 이건 뭐 기진 맥진입니다. 저는 소수의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낼 수가 없거든요. 외국인 목사들 수천 명이 모여있는데 그것을 다 제쳐놓고 당신 한국사람이니까 한국사람 있는데 와야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억지가 사촌보다 낫다고 하더라 이러면서 로비에서 진을 치고 있어서 호텔 사람들이 논란을 하고 보통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나가서 왜 이러십니까 하고 물으니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기들은 제가 미국에 오는 줄도 전혀 몰랐는데 한 사람은 폐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한 여자 분은 위암에다 자궁암으로 죽어간답니다. 암환자가 둘이 있는데 그의 남자가 기도를 하다가 하루는 꿈을 꾸었답니다. 꿈속에서 주님께서 나타나시더니 조용기 목사가 미국 뉴올리언스에 강의하러 가니 네가 조용기 목사를 찾아가서 안수를 받으면 나을 것이다. 그르더랍니다. 그래서 이 뉴올리언스로 온다는 말도 못 들었고 해서 뉴욕 우리 본부로 전화를 하고 사방으로 연락을 해보니까 제가 벌써 뉴올리언스를 떠나서 루이 벨에 가 있다가 떠나서 탈사 오클라호마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시카고에서 비행기를 타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살든지 죽든지 결판을 내고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간절히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 남자도 기도해주고 부인도 기도해 주고 그랬는데 그 이튿날 남자가 가면서 비행장에서 전화를 해주었습니다. 간밤에 잠을 자면서 기침을 하는데 입에서 폐암덩어리가 툭툭 떨어져 나오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프던 것이 싹 나았다고 너무나 감사하고 기쁘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오늘날도 마귀에게 눌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즉시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일을 성령 가운데서 우리에게 오늘날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섯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오셨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은혜의 해라라는 것은 구약의 희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을 팔던지 전토를 팔던지 혹은 가난해서 몸이 종으로 팔면 팔린 지 오십 년 만에 희년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십 구 년에 큰 속죄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희년에 나팔을 오십 년에 불면 전국에서 산 땅도 본인에게 돌려주고 집도 돌려주고 종으로 팔린 사람도 자유를 얻어 나갑니다. 그래서 원상태로 복구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유대나라에서는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오십 년밖에 부자로 못삽니다. 그 후에 희년이 되면 전부 산 것을 다 본인에게 돌려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공평하게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 희년의 제도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희년을 전파하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 생애 동안에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 과연 집을 팔은 사람에게 돌려주고 땅을 팔은 사람에게 돌려주고 종으로 팔린 사람이 원상 복귀가 되어 가는 이런 역사가 일어났나요? 그런 일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거짓말을 했나요? 예수님이 거짓말을 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희년을 전파하러 왔다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 우리가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 아담안에서 우리가 에덴에서 쫓겨 나와서 하나님과 교통을 잃어버리고 에덴의 축복도 다 잃어버리고 그리고 영생도 잃어버리고 건강도 치료도 잃어버리고 저주받아 내어 쫓겨버린 이런 빼앗긴 땅에서 잃어버린 땅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희년의 기쁜 소식을 전하겠다. 십자가의 대속을 하시고 난 다음에 오순절 성령의 나팔을 불게 해주시므로 이제는 잃어버린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돌아가고 영생으로 돌아가고 에덴의 하나님의 축복의 예비로 돌아가고 영생과 치료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축복의 세계를 열어놓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유대인들이 고향산천으로 전토를 다 물려받고 집을 물려받고 종에서 놓여남을 받지는 안했다할지라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옛 아담에서 빼앗긴 것을 예수님께서 도로 찾아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 예수 안에서 우리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얻을 수가 있으며 영생을 소유할 수가 있고 저주에서 해방을 얻어 하나님과의 예비한 축복 속에 들어갈 수가 있으며 치료와 영원한 삶을 얻은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것인데 예수님 안에서 도로 찾아 주님의 은혜 속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인간적이 아닌 성령의 능력안에서 일어난 것이고 집단적인 사회적인 국가적인 것이 아닌 개인안에서 체험하고 이루어줄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직 집단적인 사회적이며 국가적인 이와 같은 구원은 주님께서 천년 왕국에 그때 가서야 이루어질 것이지 현재 삶 속에는 사회적인 구원이나 국가적인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현재는 예수님을 믿는 개인 개인의 생애속에 주께서 들어오셔서 가나한 자에게는 복된 소식의 신념을 주시고 포로 된 자에게는 자유를 눈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는 자유케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개인 개인에게 전파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개인 개인이 예수님을 믿고 만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와 같은 위대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얻어 누리다가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과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는 그 날에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살아있는 우리들이 변화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천년 왕국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야 비로소 집단적이고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단체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부지런히 전도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개인적으로 그 받은 은혜로서 이웃을 전도하고 살리고 도와주는 일을 계속할 것이요. 절대로 집단적이고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는 아직 때가 오지 안았습니다. 이것은 오직 주께서 만왕의 왕만 주의 주로 강림하시는 그 날에 천년 왕국 이후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개인 개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 개인 개인에게 참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살아 계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 게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운행하고 역사 하시 옴을 감사하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우리 개인 개인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주님. 한 사람 한 사람 주님을 모실 때 가난에서 해방을 얻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눈을 열어 영생을 보게 하고 믿게 하고 얻게 하여 주시옵시고 눌린 곳에서 자유를 얻고 치료받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아버지 받아 들여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영생을 얻고 저주에서 해방을 얻고 위대한 주의 영광의 은총을 받은 자리에 들어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 계신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시여, 너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너희 중에 있겠노라고 말하셨는데 이 가운데 지금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 옴을 감사하옵나이다. 사랑하신 아버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기적이 우리 성도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 모든 일에 나타나게 도와 주시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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